[인터뷰]정년퇴임 앞둔 문학평론가 백낙청교수

  • 입력 2002년 12월 9일 17시 56분


스스로에 대해 ‘노력가’라 평하는 백낙청 교수. 그는 ‘혼자서 책보고 글 쓸 때가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스스로에 대해 ‘노력가’라 평하는 백낙청 교수. 그는 ‘혼자서 책보고 글 쓸 때가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백낙청, 그 앞에는 ‘대지의 지식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골짜기나 유역의 지식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 고은)

백낙청(白樂晴·64·영문학) 서울대 교수는 계간 문예지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이자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시민운동가로서, 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진 역할들을 긴밀하게 일체화해 온 이 시대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평가된다.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그는 지난주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이후의 로렌스’라는 고별 강의까지 마쳤다. 백 교수를 만나기 위해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시민방송(RTV)을 찾아갔다.

“시골에 사는 옛 제자도 왔더군요. 많은 분들이 고별 강연에 와줘서 영광스럽고 참 고맙습니다.”

-‘백낙청’이라는 이름과 ‘창비’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고별 강연에는 ‘창비’에서 오신 분들도 자리를 함께하셨던데요.

“근래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상태에서 잡지 편집인으로 회사의 큰 방향을 정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는 필자로서 활발하게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는 1966년 ‘창비’ 창간 이후 판매금지(1975·1977) 강제폐간(1980) 등 온갖 박해 속에 ‘창비’를 지켜왔다.

“탄압에 저항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창비에 대한 독자들의 성원은 굉장히 중요했지요. 유신시대에는 필자가 잡혀가는 등 탄압을 받을 때마다 잡지가 더 잘 팔렸어요. 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있을 때도 빨리 나가고 싶었던 마음 한편으로, 기왕 잡힌 거 하루 이틀 더 있다 가면 좋겠다 싶기도 했어요. 그만큼 사업에 플러스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웃음)

“초기에 백 선생이 ‘창비’의 주인이며 또 한 부분이었다면, 6월항쟁 이후 15년 동안 그와 창비는 더 일체화됐다. 그의 창의와 노력이 더 큰 부분을 차지했고, 그는 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백 선생이 이끄는 ‘창비’는 한국사회에서 여러 쟁점을 제기해 논의를 주도해 왔다. 깨우침을 줬고, 왜곡된 시각을 조정했다.” (이성원 서울대 교수·영문학)

-‘최고의 기쁨’은 아니겠지만, 사업에 적성과 소양이 있으신가 봅니다.

“식민시대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올바른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이 국가 운영에서 배제됐습니다. 또 지조를 지키려면 반대해야 하기도 했고요. 참여가 곧 훼절인 시대였으니까요. 이 시기를 거치면서 지식인은 실무를 못해도 되는 것 같은 풍토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주인 노릇 하는 지식인이 되려면 실무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이 나의 실무적 과제로 주어졌고, 최대한 잘해 보려고 했지요.”

“백 선생은 원칙을 세우면 끝까지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 대개 원칙주의자들에게 유연성이 없다는 비판이 가해지나, 그는 원칙을 지켜 가면서 낡은 것을 갱신해 간다.” (이시영 ‘창비’ 상임고문)

-너무 완벽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책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예요. (웃음) 작은 일에 신경쓴다는 얘기 역시 완벽주의자라는 면과 상통할 수 있겠지…. 나도 엉뚱한 일을 잘 저질러요. 예전에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RTV도 다 그런 거지요.” (기자는 앞서 그의 제자에게서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한테는 작은 일까지 섬세하게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늘 지치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 타고난 공동체 윤리. 백 선생은 늘 앞에 있지만 늘 뒤에도 있다.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 마시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한다.” (고은)

‘창비’를 통해 ‘민족문학론’의 중심을 잡아 가며 리얼리즘에 관한 글을 써 온 그의 문학이론에는 분단이라는 민족의 고민과 세계인식이 동행해 왔다.

-영문학자와 한국현대문학비평가의 역할을 함께 해오셨습니다. 선생님께 있어 영문학과 한국문학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영문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한국문단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창비’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나를 평론가로 설정했습니다. 영문학 자체를 본격적으로 조사 연구하는 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로서 영문학을 연구한 것이지요. 영문학 논문을 쓸 때도 한국어로 쓰는 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문가의 자제(6·25 때 납북된 아버지는 백붕제 변호사, 큰아버지는 백병원 원장이었던 백인제 박사다)로 경기고 졸업 후 미국 브라운대와 하버드대에서 수학하는 등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거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와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함께 자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까.

“국내에서 엘리트 코스 밟는 것과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살다 돌아온 것은 다른 면이 있어요. 변칙적 엘리트 코스지.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 당연히 기득권에 선다고 생각하는 일반론이 있지만 그건 하나의 편견이에요. 어느새 이런 편견이 사회에서 폭넓게 자리잡은 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지요.”

퇴임 후 백 교수가 세운 ‘1차 목표’는 D H 로렌스 관련 저서를 내는 것. 로렌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아직 로렌스 책 한 권을 내지 못했다는 자책에서다. 그 다음으로는 휴업하다시피 했던 한국문학평론 작업을 할 계획이다. ‘영원한 현역 비평가’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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