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긴또깡´ 신드롬

  • 입력 2002년 10월 21일 18시 31분


“당신은 왜 죽음과 감옥살이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피아를 했는가.”

조직을 배신하는 법정 증언을 하고 미 연방수사국(FBI)의 보호를 받는 마피아 중간 보스는 기자의 질문에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비 오는 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졸개들이 받쳐든 우산 속을 걸어 벤츠 승용차에 올라탑니다. 예약 없이 레스토랑에 가도 가장 전망 좋은 자리는 내 차지입니다. 술집에서 미인을 찍으면 부하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방으로 데려옵니다.”

▼영웅 갈망하는 대중심리 반영▼

오래 전에 미국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이 인터뷰 기사는 신체가 강하고 빠른 청소년들이 거리의 조폭이 되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중에는 ‘대부’ 등 마피아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많다. 돈과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마피아 세계의 음모 배신 갈등 투쟁 살인은 인간의 흥미를 끌 만한 극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잘된 마피아 영화는 전쟁 영화 이상으로 재밌다. 일상의 틀 속에 갇혀 사는 관객들은 마피아 영화를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는다.

협객 김두한씨를 다룬 SBS ‘야인시대’가 사극 ‘태조왕건’이 세운 기록을 깨고 시청률 50%를 넘어섰다. 김씨의 일대기가 극화된 것은 ‘야인시대’가 처음이 아니다. 1990년에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서울에서만 관객 67만명을 동원하는 사상 최고기록을 수립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만큼 호기심을 끌 만한 이야깃거리로 가득 찬 삶을 산 사람이드물다.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로 자라다 18세에 서울 종로통을 평정하고 20세에는 전국 주먹계의 통일천하를 이룩한다. 해방 공간에서는 좌익을 깨부수는 우익의 주먹으로 활약하고 자유당 시절에는 이정재 유지광 등 정치깡패들로부터 야당을 지키는 경비대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박정희 시대에는 유명한 국회 분뇨투척 사건을 일으켜 고문 후유증으로 삶을 마감했다.

약점을 까발리는 청문회와 네거티브 선거전의 영향인지 스포츠 스타를 제외하고는 대중으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야인시대’의 김두한 신드롬은 야인(野人)과 영웅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스타를 스포츠가 아닌 분야에서도 찾아보고 싶은 대중의 갈망에 ‘야인시대’의 타이밍이 들어맞았다고도 볼 수 있다.

주먹들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보다 시원한 구석이 있다. 주먹의 대결에서는 재수가 없다. 구마적이 김두한씨에게 패배하고 열차를 타고 만주로 떠나는 장면은 재수 3수 4수가 흔한 정치판과 비교돼 화제를 끌었다.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신화나 야사는 더러 실제 사실과 많은 차이가 난다. 아버지 김좌진 장군은 독립군 사령관이었지만 김두한씨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 일본 야쿠자 몇 명을 혼내준 것이 일본의 압박에 눌려 살던 민초들의 가슴을 어느 정도 시원하게 해주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곧 독립운동은 아니다. 1969년에 녹음된 동아방송 노변야화 육성 테이프에는 그가 종로경찰서 일본 순사들과 친하게 지낸 회상이 나온다. 대중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김두한씨는 야사의 영웅 또는 신화의 위치에 근접한 인물이고 그를 둘러싼 사실의 왜곡은 부차적일 문제일 수 있다.

▼´폭력미화´ 부작용 신경 써주길▼

‘야인시대’의 성공을 보면서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대목이 있다. 한국의 방송은 따라하기 베끼기 빌려오기의 천재들이다. 한쪽에서 ‘여인천하’로 손님을 끌면 다른 쪽에서 ‘태조왕건’으로 흥행몰이를 한다.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다보면 사극의 시대가 가고 조폭 드라마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겁난다.

‘야인시대’ 첫머리에 ‘15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므로 부모의 시청지도가 필요하다’는 경고문이 나오지만 ‘야인시대’ 시청자 중에 10대가 64%를 차지한다. 초등학생들 사이에 ‘긴또깡’(김두한 일본명)을 모르면 대화가 안될 정도라고 한다. 청소년들이 조직폭력 범죄에 관해 긍정적인 태도를 형성하거나 의리를 지키자면 사람을 때리거나 죽여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도록 ‘야인시대’ 제작진이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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