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잃어버린 추석

  • 입력 2002년 9월 23일 18시 03분


들판 가득히 넘실거리는 황금빛 물결, 장대로 털면 밤알이 후드득 떨어지던 밤나무 숲,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휘어진 감나무…. 남루한 집 마당에서도 추석빔을 차려 입은 아이들이 뛰어 놀고 타관에 취직한 사람들이 한껏 멋 부린 양복 차림으로 돌아와 낯선 고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어린 시절 추석의 모습은 밝고 즐거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의 중년 세대가 어린 시절 추석을 보낸 50, 60년대에는 농민이 전체 인구의 60∼70%를 차지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농업국가라는 말이 자랑스럽게 쓰여 있었다.

이번 추석에도 귀성길 체증에 시달리며 내려온 서울 경기 번호판 차량이 고향 마을의 안길을 가득 메웠지만 농촌의 추석 분위기는 해가 갈수록 가라앉는다. 어린 시절에 수줍은 미소를 던져주던 새댁들은 기력이 빠진 노인이 됐고 지금 농촌으로 시집오는 아가씨들은 예전의 새댁들 같지 않다. 중국 옌볜 처녀로도 모자라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필리핀에서 온 신부들을 더러 만난다. 이웃 마을의 분교는 취학아동이 줄어들어 폐교가 된 지 오래다.

태풍 루사가 때리고 간 농촌에서는 추석이 실종됐다. 신문 방송에는 강원 강릉 일대가 주로 보도됐지만 충북 영동, 전북 무주, 경남 함양 등 소리 소문 없이 골병든 고장이 많다. 태풍 피해가 적은 농촌에서도 농민들이 쌀 농사를 지어봐야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쌀은 단순한 곡식이 아니다. 농민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고 거의 유일한 소득원이다.

논농사 한 정보(3000평)를 지으면 연간 소득이 400만원 정도이다. 농민들의 복지 수준을 생각하면 쌀값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올라야 하겠지만 쌀시장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제 시세보다 4∼5배 비싼 쌀값을 오히려 떨어뜨려야 한다. 쌀이 남아돌아 천덕꾸러기가 된 판에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매년 쌀 수입량을 늘려가야 하니 한국 농촌의 문제는 해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스위스는 전 국토의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그림 엽서처럼 아름다운 나라이다. 깎아지른 산비탈 목장에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 위로는 알프스의 만년설이 하늘을 이고 있다. 산악 지역의 목장에서 생산되는 스위스 우유는 이웃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우유보다 훨씬 비싸 경쟁력이 떨어진다. 스위스 정부는 WTO 협정을 우회하는 환경보호 동물복지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농촌을 지원하는 이유는 농민들이 바로 국토환경 지킴이, 민속문화 지킴이이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아름다운 스위스의 국토환경을 가꾸고 전통문화를 대대로 이어 내려간다. 그리고 도시로 집중되는 인구를 분산시킨다. 농촌 지원은 저소득층에 대한 최선의 복지정책이기도 하다.

미국도 소득보전 정책과 가격지지 정책을 병행하며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세계에서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나라는 농지가 방대하고 인구가 희소하거나 국가의 재정 부담 능력이 낮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등 케언스그룹 15개국뿐이다.

산업화 물결 속에서 대다수 국민이 도시의 아파트에 거주하며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으로 먹고 사는 사이에 농민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농촌인구가 농업국가 시절에 비해 10분의 1가량으로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전체 국민의 8%, 400만명가량이 농촌에 산다. 농업에 대한 직접 지원이 어려워져 농산물 가격을 시장 기능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열패자와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정책 차원에서 농정의 틀이 새롭게 짜여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97년 대선에서 1.6%포인트의 승리를 거둔 데는 ‘농김도이(農金都李)’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농민들의 표가 한몫했으나 이 정부에서 농민들의 소득보전 정책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우직한 농민들 덕에 뽑힌 선량들은 농민 소득보전을 국정의 주요 이슈로 삼으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볼 일이다.

차가 막히는 귀성길에서 짜증이 나는 자녀들은 부모들의 시대가 가고 나면 아버지의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이 될 것이고 그것을 말려야 할 이유도 없다. 시골에서 상경 열차를 타고 올라와 일자리를 잡고 대학에 다닌 세대가 현업의 무대에서 퇴장한 뒤에는 농촌의 추석이 더 쓸쓸해지고 농촌과 도시를 잇는 가냘픈 정서의 끈마저 단절된다.

한국의 농촌에서는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잡을 젊음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망각 속에 버려져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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