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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9월 12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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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을 잊지 않겠다는 미국인들의 생각은 테러와 자유의 여신상을 연계시키는 고도의 상징조작을 한 부시 대통령에 못지않은 것 같다. ‘그라운드 제로’로 불리는 세계무역센터(WTC)가 서 있던 자리에서 11일 하루 종일 열린 추모행사는 비극을 잊지 않으려는 미국인의 각오를 잘 보여준다. 희생자 2801명의 이름이 차례차례 불려지는 동안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에 차례로 여객기가 부딪치는 순간부터 시작된 대참사를 떠올리며 부시 대통령과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라운드 제로 주변 건물에 걸린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는 대형 플래카드가 미국인들의 심경을 잘 설명하는 것 같다.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미국인의 성격은 하와이에 가면 잘 알 수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에 의해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 미국인은 일제히 ‘진주만을 기억하라’고 외쳤다. 21척의 군함이 침몰하고 347대의 전투기가 파괴되고 2409명의 군인이 전사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미국인은 그날을 잊는 대신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1100여명의 승무원과 함께 가라앉은 전함 애리조나의 침몰지역에는 박물관까지 만들었다. 그곳에 가면 지금도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미국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면서 국민적 일체감을 만드는 것이 미국의 힘이다. 진주만 기습을 잊지 않아 2차 대전에서 승리했듯이 미국이 9·11을 잊지 않으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를 잊지 않는 습성을 고려하면 세계무역센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라운드 제로가 되듯이 테러범을 끝까지 응징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결심이 갑자기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세월이 흐르면 그라운드 제로는 또 다른 진주만이 될 것인가.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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