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수해현장 가는 까닭은

  • 입력 2002년 9월 11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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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사회의 최우선 과제는 신당창당도 병풍공방도 국정조사도 아니다. 태풍 ‘루사’의 엄청난 상처를 치유하는 것보다 앞서는 일은 없다. 인명피해 200여명, 이재민 8만8000여명, 건물침수 1만7000동, 농작물침수 14만4000㏊, 재산피해 5조5000여억원이란 기록적인 수치가 말해주듯 지금은 비상사태다. 뉴스를 쫓는 언론의 속성상 수해속보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진흙에 묻힌 이재민들의 고통은 전국 곳곳에 그대로다. 응급조치로 당장 급한 궁경(窮境)은 넘겼다 하지만 제대로 복구된 것은 별로 없다. 사실 본격적인 위기관리는 지금부터다. 태풍 일과(一過) 후 분주하게 피해현장을 찾던 정치지도자들의 발걸음도 뜸하다. 정치가 민심을 추스르는 일이라면 수시로 현장을 찾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복구작업은, 또 구호사업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그것이 바로 정치다.

▼한숨과 분노를 느껴야▼

그런데 정치지도자, 더욱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라면 진흙을 치우고 떨어진 과일을 줍고 가재도구 정리를 돕는 위로방문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국가적 위기를 관리하는 사명감을 심각하게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장의 소리를 들어보라는 말이다. 아무리 큰 명분의 중앙정치라도 뿌리는 현장이다. 다시 몸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한 이재민들로부터는 분명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한숨과 분노를 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것이 정치지도자가 할 일이고 수해현장에 가야 하는 이유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기막힌 일이 또 있다. 태풍피해 지역의 등급을 매기는 특별재해지역 지정을 놓고 정부와 이재민들이 줄다리기를 벌여야 할 상황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가산을 날려버린 이재민을 놓고 피해 정도를 깎아야 하는 경우가 벌어지게 됐으니 태풍 못지않은 또 다른 재난이다. 특별재해지역 지정에서 빠지는 이재민들의 마음은 오죽 쓰리고 아프겠는가. 지난주 전북과 광주 전남 태풍피해 지역에서 만난 기관장들은 “강릉과 김천, 김해 등지의 참혹한 현장을 보니 크게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호남지역의 피해상황도 엄청나다”고 했다. 하기야 호남이나 강릉 등지의 이재민 개개인을 놓고 보면 졸지에 생활터전을 잃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강릉지역에 이재민이 더 많고 집중돼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유야 어떻든 정부가 이재민들을 상대로 재해등급을 깎는 일만은 피해 가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본원적 임무다. 더욱이 지금은 비상사태요, 위기요소가 산재해 있는 심각한 시점 아닌가. 바로 여기에 정치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재민들의 재산피해와 정부의 구호 및 복구지원 비용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벌써부터 피해상황 실사에 나선 공무원들과 피해를 주장하는 이재민 사이에서 피해액 산정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고 있으니 어떻게 결말이 지어지든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자칫 위기관리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달을지 모른다. 실제로 재해대책법에 의한 구호 수준은 피해상황에 크게 못 미친다. 기본적으로 정부구호는 기초적인 생활비와 학자금 지원, 그리고 작물은 묘목비, 가축은 새끼, 양식어류는 치어를 기준으로 하고 있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농경지나 농작물 복구 비용도 면적에 따라 다르지만 피해 농민이 40%, 30%를 각각 부담해야 한다. 이런 지경이니 이재민구호라 하지만 생색용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정치지도자들이 알아야 할 대목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늑장행정에 일침을▼

더욱이 피해조사가 끝나고서도 해당 이재민들의 손에 돈이 쥐어지기까지는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치느라고 통상 2, 3개월이 걸린다는 사실도 이재민들에겐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긴박한 상황이라 하면서도 그토록 긴 시간이 걸린다면 그것은 분명 늑장행정 아닌가. 7월 초 태풍 ‘라마순’의 피해복구 예산이 최근에야 확정되었고 그나마 지자체 의회의 심의를 거치려면 다시 한 달여를 기다려야 한다는 일부 지역의 실정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심지어 늑장 배정으로 복구예산이 다음 해로 넘어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이고, 무엇을 하자는 정부인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재민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이번에도 이재민을 그렇게 울리겠는가. 현장에 간 정치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그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정부규정과 피해현장간의 차이를 메우는 일이야말로 정치인들의 몫이다. 지금 정치인들은 기대를 주느냐,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을 안기느냐는 기로에 서 있다. 이재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살려보겠다고 자청해 찾아간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감동의 정치’보다 더한 대선전략은 없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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