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정치 9단들이 남긴 것

  • 입력 2002년 8월 27일 18시 20분


정작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은 정치였다. 우리가 정치 9단들에게 바랐던 가장 큰 기대는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으나 요즘의 ‘난타정국’을 보고 있으면 정치 9단들의 유산이 한 10년은 더 가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현대정치사에서 소수 특정인이 한 국가의 정치를 30년 넘게 좌지우지해온 나라도 드물다. 인색하게 보면 민주화 15년은 그들의 개인적 한을 풀어주었던 세월처럼 보인다. 국민은 약간 발전된 민주주의를 그 대가로 얻었는데 그 때마다 되풀이된 권력투쟁과 맞바꾸면 남는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프리덤하우스’의 지표로는 한국이 민주화의 모범국가로 분류되어 있지만 민주화의 사회심리적 보상 척도로 새롭게 조명하면 마이너스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척결정치…창당버릇…▼

혹자는 지금의 정국을 산고(産苦)라고 사뭇 후하게 평가하는데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태풍이 지나가면서 내뿜는 후폭풍(後暴風)에 휘말려 있다는 생각이다. 때로는 후폭풍은 태풍보다 더 무섭고 위력적이다. 한국의 정치는 지금 정치 9단들의 퇴장이 일으키는 뒷바람에 사납게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주도한 민주화’의 미래는 ‘그들이 남긴 것’을 어떻게 빨리 버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이상한 역설이 우리의 현실이다. 웬만큼 민주화된 다른 나라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두 개의 유산은 이러하다.

첫째, ‘척결의 정치’. 정치 9단들은 ‘보복’이란 말 대신 ‘척결’이란 말을 쓰기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할 수 없이 보복적 성격을 띠었다. 군부정권을 심판하는 방식이 부정 일소, 인사, 개혁정치의 수법에 스며들고 급기야 정적 제거의 비법으로 자주 둔갑했으며 임기 말의 그것은 자신을 겨냥하는 비수로 변했다. 노풍(盧風), 정풍(鄭風), 병풍(兵風)이 어찌됐든 자신을 척결하는 칼바람이 되지 않기만을 고대해야 하는 통치자의 모습은 슬프다.

둘째, ‘창당 버릇’. 이거야말로 정치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산의 꽃일 터인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국민의 정치적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마취제로 작용했다. 1987년 이후 15년 동안 YS가 3개, DJ가 4개, JP가 3개의 신당을 만들어 정치 9단들이 행한 변신이 모두 10차례에 이른다. 여기에 정주영 박찬종 이인제 이종찬씨의 중소형 신당과 김윤환 박근혜씨의 이탈을 포함하면 15개의 정당이 탄생과 소멸을 반복했다. 창당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조직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구세력이 ‘이미지 세탁’을 통해 ‘전과’를 말소하려는 목적으로 유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정책실패의 책임, 지지율 급락, 내부 분열의 위기를 일거에 해결하는 이 한국적 처방전은 정치 9단들이 단행한 최후의 비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현재도 지리멸렬한 민주당에 유일한 돌파구가 된 듯 싶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치 9단들이 10장의 카드를 흔들어대는 통에 정신이 약간 혼미해지기는 했지만 그 핵은 대구(부산) 광주 대전으로 대표되는 지역구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평범한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는 더욱 그러했다. 그동안 합당이나 연합 등 그럴듯한 정치적 전략들도 가끔 동원되었는데 결국은 거점도시로 귀환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거점도시의 브리지전략으로 대통령후보가 된 노무현씨는 이 ‘아메바형 정당’의 회귀본능을 막아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골 깊은 지역구도 경계를▼

정치 9단들이 남긴 이런 유산은 대선주자들에게는 버거운 짐이자 덫이다.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정몽준씨에게는 창당을 지탱해줄 거점도시가 없고 창당비용도 예전 같지 않다. 혹시 실패한다면 아버지처럼 당분간 척결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 원내 정당이 새롭게 구성되어 자신을 추대하라고 강한 시그널을 보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와신상담 중인 이인제씨는 거점도시를 아직도 장악하고 있는 JP의 눈치 속에 기존 정당들의 분열 틈새를 노려야 하는 열세에 처해 있다. 경선 승리자 노무현씨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지 무지개연합의 장수가 될지는 두고봐야 한다. 온갖 정치적 포화가 집중된 이회창씨는 거점도시를 분할하려는 경쟁자들을 포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수월치 않다. 또 병풍을 뚫고 난 뒤에도 향후 4개월 동안 자신에게 쏟아질 공세용 리스트를 척결 공약 속에 넣어야 할지를 곧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든 5년 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끔찍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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