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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25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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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미술품 경매를 선도하고 있는 서울옥션의 경매 장면. 사진제공 서울옥션
“한국 미술품 거래가의 90%는 거품이다. 작가 A가 호당 100만원을 받으면 A와 비슷한 학벌의 동년배 작가 B도 호당 100만원을 받으려 한다. 작품의 우열은 온데 간데 없고 작품가격의 근거도 없다. 더 우스운 것은 정작 돈이 급하면 가격이 3분의 1, 5분의 1로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한국 미술 시장의 고질적인 병폐인 이중 거래를 지적하는 말이다. 이같은 잘못된 미술 유통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경매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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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경매 활성화의 청신호〓3월 박수근의 유화 ‘겨울’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현대미술 해외 경매 최고가인 57만달러(약 7억5000만원)에 팔렸다. 3월말 국내의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초가집’이 4억7500만원에 낙찰돼 한국현대미술 국내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세우더니 5월엔 박수근의 유화 ‘아이 업은 소녀’가 5억500만원에 낙찰돼 또다시 기록을 경신했다. 특히 ‘초가집’ ‘아이 업은 소녀’는 미국인 소장가가 국내 경매에 출품한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한국 경매에서도 미국 못지 않은 가격에 팔릴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수근 바람에 힘입어 경매 제도가 정착되면 한국 미술 시장이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다는 기대가 고조되고 있다.
▽한국 미술품 경매 현황〓1979년부터 간헐적으로 이뤄지던 국내 미술품 경매는 외환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서울옥션 경매로 본격화됐다. 당시 돈이 아쉬운 소장가들이 급매물을 내놓았고 갈 곳 몰라하던 돈이 경매로 몰렸던 것이다.
현재 국내 경매사(인터넷 경매 제외)는 서울옥션 코리아아트 한국미술품경매 명품옥션 등 4곳. 가장 대표적인 서울옥션은 2001년 한해 7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올해에는 상반기에만 70억원을 기록했다. 2001년 국내 전체 경매액은 약 90억원. 서울옥션의 박혜경 경매팀장은 “경매에서 미술품을 구매하는 연령층이 50∼60대에서 30∼40대로 확산되면서 하반기엔 경매가 더욱 대중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왜 경매가 필요한가〓경매의 가장 큰 장점은 시장 논리에 바탕을 둔 거래의 투명성이다. 화랑과 작가를 통해 개인적으로나 음성적으로 가격이 결정되던 기존의 관행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가격 거품을 뺄 수 있다.
유명작가의 그림이면 무조건 크기(호수)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는 ‘호당 가격제’의 폐해도 극복할 수 있다. 장욱진의 6호짜리 작품의 경우, 1억5000만원에 낙찰된 게 있는 반면 8000만원에도 유찰된 게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구매자의 안목도 향상된다.
아울러 가짜 미술품을 걸러낼 수도 있다. 경매 출품작들은 일주일 이상 공개 전시를 하기 때문에 가짜가 발붙이기 쉽지 않다.
▽경매가 한국 미술에 미치는 영향〓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국내 현역작가는 1만5000여명이지만 소장가는 300여명이다. 수요가 공급에 절대적으로 못미치기 때문에 미술품 거래의 숨통이 막혀있다”고 진단한다. 최 교수는 잠재 콜렉터를 미술 시장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현재로선 경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올해 상반기 서울옥션 경매 참가자를 보면, 연간소득 5000만원 미만이 54.6%, 5000만∼1억원이 34.5%로 나타나 미술 경매 시장의 주도층은 이들 ‘중산층’임을 알 수 있다. 경매가 활성화되면 그에 따라 작가들의 명암이 엇갈리게 된다. 류석우 ‘미술시대’ 주간은 “경매가는 미술 시장에서 우열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작가들의 경쟁력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 현역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경매에 참가할 수 있어 창작 의욕이 고취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상반기 서울옥션 경매 결과, 낙찰 작품 중 신진 작가의 작품이 29.4%에 달해 이같은 변화를 보여준다.
▽경매의 문제점과 대책〓아직까지 박수근 장욱진 김환기 이중섭 등 ‘잘 나가는’ 작가 중심으로 경매가 이뤄진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들뿐 아니라 현역 작가의 작품와 회화 뿐아니라 사진이나 설치미술, 기타 중저가 작품 등도 경매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화랑에서 경매가 거의 없거나 화랑이 경매에 출품하지 않는다는 점도 해결 과제다. 화랑들은 고객에게 비공개로 판매한 작품이 경매에서 값싸게 거래될 것을 우려해 경매를 꺼리고 있다. 류 주간은 “메이저 화랑도 경매 시스템을 갖추고 소장품을 과감하게 경매해야 한다”며 “주요 화랑과 미술관은 양질의 미술 시장 형성을 위해서라도 경매에 참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메이저 경매사가 서울옥션 한군데라는 점도 개선되어야 한다.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경쟁하듯 국내에서도 적정 규모의 경매사간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품 경매 전문가의 양성도 시급하다. 현재 국내의 경매 전문가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최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경매시장의 전체 미술시장 점유율은 약 10%로 걸음마 단계다. 전문가들은 경매시장이 미술시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해야 이중가격제의 병폐가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박팀장은 “일본 미술협회는 매년 1월 지난해 경매 실적을 토대로 작가들의 호당 가격 랭킹을 발표한다”며 “한국도 경매가 활성화되어 호당 가격 랭킹을 발표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