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50년동안 쓴 시

  • 입력 2002년 5월 1일 18시 56분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슬픔의 정서는 ‘한(恨)’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한을 다른 나라 말로 정확히 번역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다른 민족에게는 우리의 한과 같은 정서가 없기 때문이다. 한의 특징은 남에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미국 서부극에서처럼 똑같이 되갚음하기보다는, 가슴속 응어리로 떠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한의 뿌리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역사에서 시작된다. 수많았던 외세의 침입과 내란, 엄격한 신분사회 등으로 인해 이 땅의 서민들은 한을 품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은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풀어내야 했다. 우리가 택한 방법은 민속신앙과 문화였다. 굿을 통해 마음을 삭이고 소리나 민요를 부르며 분노를 달랬다. 옛 민요와 소리의 구절구절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농축된 진한 슬픔이 담겨 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으로 시(詩)를 많이 읽는 ‘시의 나라’로 꼽힌다. 시집이 어느 나라보다 많이 팔리고 시인이 대접을 받는다. 이것 역시 한의 정서와 관련이 있다. 감정을 최대한 응축시킨 시가 어떤 긴 문장보다도 우리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20세기 한반도에는 기막힌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가장 한 맺힌 일은 민족분단이 아닐 수 없다. 가족과 핏줄을 갈라놓은 채 분단의 두꺼운 장벽이 쳐진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청춘의 나이에 헤어진 이들이 이젠 백발의 노인이다. 이들이 기약없는 재회를 기다리며 불면의 밤으로 지새운 날들이 그 얼마일까. 엊그제 금강산에서 진행된 남북 이산가족 만남에서 52년 수절 끝에 북쪽의 남편을 만난 정귀업 할머니(75)가 상봉 기간 동안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바로 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을 만나게 되면 하려고 무려 50여년에 걸쳐 생각하고 골랐던 말이기 때문이리라.

▷“가시밭길도 그런 가시밭길이 없어라우. 꽃방석을 깔아줘도 가지 않을 길을 50년 넘게 혼자서 훠이훠이 걸어왔어라우. 눈물로 밥 삼아 살아왔지.” 어떤 이름있는 시인도 그의 말처럼 절절하게 표현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견우직녀는 한 해에 한 번이라도 만나는데. 시곗바늘이 한 점도 쉬어주질 않아. 시간은 가고 있어. 내 인생도 가고.” 다시 남편과 헤어져 남쪽으로 발길을 돌린 그의 한과 아픔을 풀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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