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본드걸

  • 입력 2002년 4월 5일 18시 29분


007 영화가 처음 나온 것은 1962년이었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닥터 노’다. 20세기폭스사는 이 영화로 간단히 돈방석에 앉았다. ‘닥터 노’를 시작으로 3년 전 나온 ‘언리미티드’까지 그동안 제작된 007 시리즈는 19편이나 된다. 한결같이 살인면허를 가진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 악당을 물리치는 뻔한 스토리다. 그런데도 이 시리즈가 오락영화의 대명사로 반세기 가까이 장수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기발한 첨단장비, 예측을 뛰어넘는 반전과 한숨이 나올 만큼 요염한 본드걸 때문이다. 작품성은 모르겠지만 볼거리로는 그만이다.

▷올드팬들은 본드 하면 숀 코너리를 떠올린다. 초대 본드인 그는 31세 때 처음 주인공으로 캐스팅돼 22년 동안 7편에 나왔다. 노동자, 누드모델 등을 전전하던 그는 007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지금은 명우 소리까지 듣는다. 지난 40년 동안 본드로 출연한 5명 가운데 2대 본드인 조지 라첸비를 빼고는 모두 성공한 케이스다. 이러니 ‘본드 역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본드걸은 007 시리즈에 양념처럼 등장한다. 주인공 본드가 좌충우돌하면서 슬쩍슬쩍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본드걸이다. 영화마다 본드걸은 으레 늘씬하고 풍만한 백인 미녀다. 동양인으로는 ‘007 네버다이’에 출연한 홍콩 여배우 양쯔충(楊紫瓊) 정도가 고작이다. 육체파 배우로 이름 날렸던 킴 베이신저도 그렇듯 미모와 몸매로만 따지면 본드걸이 여배우 중 단연 최고일 게다. 이렇다 보니 본드걸 패션까지 선망의 대상이다.‘닥터 노’에서 초대 본드걸 우르술라 안드레스가 입었던 상아색 수영복은 지난해 런던 경매장에서 7000만원에 팔렸다. 1960년대에 비키니 수영복이 갑자기 유행한 이유가 본드걸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동안 007 시리즈를 여성을 비하하는 영화라고 비판해왔다. 남자 주인공과 달리 본드걸은 영화마다 얼굴이 바뀌는 데다 맡은 역이 섹스 파트너 정도니 공격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일까. 올해 말 나올 20번째 시리즈의 본드걸은 이전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연기파 흑인배우 할 베리가 그 주인공이다. 서른이 넘은 본드걸이 출연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그가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누드 장면은 없다”고 말했다는 소식이다. 섭섭해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제 본드걸도 변신을 해야 하는 세상이다.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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