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평론가 김윤식교수 고별강연록 전문 -3

  • 입력 2001년 9월 13일 16시 59분


5. 연구자의 자리와 표현자의 사상 20세기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해인 1999년 저는 한 권의, 제겐 제법 뜻깊은 책을 낸 바 있습니다. 『한국근대문학연구방법입문』(서울대학교출판부)이 그것. 제 전공이 <한국 근대문학>인 만큼 그것에 대한 연구방법 입문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제 출발점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이래의 총결산이라 할 만한 것입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이 책의 머리말을 [현장성으로서의 방법]이라 하여 썼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발견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서울대출판부, 1997)는 90년도 이래 제가 대학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역사의 끝장>을 보아 버린 장면에서 재정립해야 하는 마당이기에 무엇보다 제 자신이 불안하고도 허황해진 느낌을 감추기 어려웠지요. 토대 환원주의(마르크스주의 방법론)를 비롯, 무수한 환원주의식 방법론이 세계 인식의 기초로 되어 있던 상황에 그 동안 익숙해졌던 제 자신의 굳은 체질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만큼 이 사실을 나름대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발견>이라는 말이 지닌 특별한 의미가 주어진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발견>만 해 놓으면 그만인가 하는 강한 울림이 이번엔 제 내면에서 움트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이 울림은 제가 감당하기엔 한층 아득한 것이었지요. 외부에서 주어진 것으로서의 <역사의 끝장> 의식을 대면하고 당황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었는데 <외부에는 외부의 것으로>의 방법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당황함은 이와 성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부의 목소리에 대응해야 함이란 실로 아득했는데, 왜냐하면 내부의 목소리란 그에 대응되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지요. 문자를 쓰자면 <비대칭성>의 상황이었던 것. 내부란 그러니까 내부로 돌파할 수밖에 없는 것. 화두(話頭)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로써 말미암습니다. 90년도 이래 제가 그동안 감당해 온 이런 저런 <발견>이란, 다시 말해 <발견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란, 실상은 <방법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방법>이란 내면에서 움트는 그 무엇이지요. 제가 인간 인간의 도식을 내세우기도 하고, 작품론 → 작가론 → 문학사 → 작품론 → 작가론 → 문학사의 원환 운동을 문제삼기도 했던 것은 방법의 모색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 내면의 과제를 방법이라 했을 때 이번엔 이를 조금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화두 속의 과제로 처리해 버린다면 방법 자체가 무의미해지기에 기를 쓰고 여기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 연구자인 저로서는 이 대목이 절체절명의 경지라고나 할까요. 방법이 그냥 방법일 수 없고, 뭔가 토가 달린 방법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방법론이 아니라 그냥 방법이라 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곧 방법이란 <현장성>이자 <사건성>이었던 것. 굳이 이를 현장성 (1)·(2)·(3)으로 나눈 것은 내면에 함몰되기 직전에서 몸을 건져 올리기 위한 몸부림의 일종이었지요. 작품론/작가론/문학사에 각각 현장성을 대응시키는 일의 무의미함을 부추기는 것도 내면의 목소리였고, 거기서 탈출하라고 외치는 것도 내면의 목소리였던 것. 화두이되 화두일 수 없음, 이를 방법이라 부르겠습니다. 표현자의 화두와 연구자의 화두가 각각 다르면서도 불이(不二)라는 인식의 장(場)의 모색, 바로 여기에 제가 가까스로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아직 덜 익은 데가 눈에 띄긴 하나, 제 솔직한 심경만은 그대로 보입니다. 요컨대 연구자의 처지가 이를 수 있는 궁극적인 자리를 엿보고자 한 셈입니다. 다소 어수선하긴 하나, 이 책에서 제가 내세우고자 한 것은 다음 세 가지 범주에 대한 울타리치기와 동시에 묘지기에서의 탈출 의지의 표명 및 방법에 관해서였지요. 세 가지 범주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조금 설명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제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서두에서 잠시 말씀 드렸듯, 제 출발점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였는 바, 이는 근대 문학에 대한 학문적 영역이지요. 학문(Wissenschaft, science)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이를 국문학에서 자의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한국인이 도남(조윤제) 선생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 학문이란 근대적 학문이라 믿고, 한국 문학을 이로써 파악하고자 한 도남의 기본 입장은 <국민국가>의 이념이었던 것. <국어(국가어)>만이 자국 문학이라는 기본항에서 출발, 문학을 <정신과학>(오늘의 해석학)의 일종으로 설정함으로써 도남은 학문(과학)에 기초를 놓았지요. 막연한 방법 이전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신민족주의로서의 국문학의 근대적 학문화가 그 기틀을 세운 셈. 자본제 생산양식이라는, 근대의 또다른 측면인 계급 사상이 근대적 학문의 하나임도 모두가 아는 일. 카프 문학이 이에 해당되는 것. 그 어느 쪽이든 근대적 학문으로 성립되기 위한 기본항은 객관성이겠지요. 그것은 적어도 엄밀한 자료 검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이 쪽에 몸을 담고 노력이랍시고 해왔지요. 약간의 열매로 『염상섭 연구』(1987), 『이상문학 텍스트 연구』(1998) 등을 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두 번째 제 영역은, 앞에서도 말했듯, 역사의 끝장 이후의 과제에 관해서입니다. 징후 비평이 그것인데, 이는 묘지기의 신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지요. 학문 역시 그러하긴 해도 징후 비평은 그 강도랄까, 순도(純度)가 극단적이었던 까닭입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으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나 할까요. 이런 저를 어떤 문학자는 조롱이라도 하듯,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어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생명의 황금 나무만이 녹색이다>(『파우스트』)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이에 한술 더 뜨듯, 『법철학 서설』의 저자 헤겔은 이렇게 설파해 놓지 않았던가. <회색에 회색을 거듭 칠해도 생명의 녹색은 되살아나지 않으며 단지 사변적으로 될 뿐>이라고. 이 늪에서 벗어나는 방도는 과연 없는 것일까. 묘지기에서 벗어나기, 미라에게 내몸을 빌어주기에서 벗어나, 내 피와 숨결, 몸냄새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나만의 것>의 영역 개척은 과연 불가능한가. 『한국근대문학 연구방법론 입문』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 찾기에 더도 덜도 아니었던 것. <비평가>와 <문학사가>의 대담으로 일관된 이 책의 마지막장이 [화두로서의 표현자와 연구자]로 되어 있거니와 연구자의 몫과 비평가의 몫을 조목조목 따져가다 보면 학문으로서의 생명인 논리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징후 탐색 및 그 보존으로서의 징후(현장) 비평에서도, 그 징후에서 벗어난 잉여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두 잉여 부분의 발견이야말로 묘지기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길이 아닐 것인가. 제가 이를 두고 이름붙인 것이 바로 연구자와 나란히 선 <표현자>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연구 및 비평의 자립적 근거를 묻는 것이지요. <소멸의 장소> 찾기라고나 할까요. 이를 조금 그대로 따오면 안될까요. 기행문을 위장한 『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2001)의 세계 꿈꾸기가 그것. 이 둘이 마주쳐 공명하기가 그것. <울림>과 <헛것>이 서로 스며들기가 그것. 이 <소멸의 장소>에 이르기가 그것. 이를 조금 옮겨다 놓고 싶습니다. "비평가: 선생의 화두란, 표현자의 그것이자 연구자의 그것이 아닐 수 없지요. 생뜨 빗토와르 산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광주리 속의 사과를 들여다 보며 <사과가 되라!>고 무수히 외치며 캔버스 앞에 앉아 있던 초라한 화가 세잔느모양 네모진 책상 앞에 앉아 서울운동장보다 넓고 아득한 원고지를 향해 <표현자가 되자!>고 무수히 외치고 있는 선생의 목소리가 선연합니다. 문학사가: 화두라? 그 쪽에서 제 내면의 목소리까지 듣고 있는 마당이기에 이젠 어떤 교묘한 변명도 별 소용이 없겠네요. 화두이기에 그러합니다. 홍인(弘忍)의 수제자 신수(神秀)와 육조 혜능(慧能) 사이에 벌어진 선문답에 어찌 이르겠습니까. 돈법(頓法)이냐 점법(漸法)이냐를 문제삼기에 어찌 이르겠습니까. 화두란, <점돈(漸頓)>을 함께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저 같은 연구자에 있어 화두란 실상 따로 있습니다. [광장](1960)의 작가 최인훈의 『화두』(1994)가 그것이지요. '이 소설의 부분들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하지만 그 부분들의 원래의 시간적·공간적 위치는 소설 속에서는 반드시 원형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이 소설은 소설이다.'([독자에게])이렇게 선언한 대작 아닙니까. 10년 침묵 끝에 솟아오른 것. 어째서 제목을 <화두>라 했을까. 표현자로서의 최인훈의 현장성(1)·(2)·(3)이라는 뜻이 아닐 수 없지요. <갈 데까지 간 경지>를 두고 화두라 부르는 것. 그것은 점진적 깨침일 수도 있지만 한 순간의 도달점이기도 한 것. 신수와 혜능이 한 자리에 서는 경지라고나 할까. 비평가 : ……. 문학사가 : 먼저 최인훈식의 현장성 (3)을 잠시 엿볼까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70∼71) 연작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는 대목. '박태원은 이 제목으로 한 편을 썼지만 나는 그 분위기가 그렇게 끝나기에는 아까운 형식으로 보였다. 그가 북쪽에서 이 제목을 다시 사용할 가능성은 없다고 나는 판단했다. 가령 사용해서 그의 손에서 제2, 제3의 [구보씨 ……] 속편이 나온다고 해도 남쪽의 우리 눈에 띄지는 못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해방 전의 그의 원전 [구보씨……]도 가까운 장래에 남쪽에서 햇빛을 볼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1970년 현재에서는 환상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70년 현재에서 볼 때 [구보씨……]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물론 수긍할 만한 미래 말이다) 우리 문학사에는 없는 존재라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구보씨……]라는 이름으로 모작을 씀으로써 나는 우리 문학의 연속성의 단절에 항의하고 <민족의 연속성>을 지킨다는 역사의식을, 문학사의 문맥에서 실천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구체적인 역사의식이었.'(민음사판, 제2부, pp.50-51) 문학사의 시선, 그러니까 현장성 (3)의 장면입니다. 70년도 현재의 역사의식이 실로 구체성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비평가 : 그 역사의식이 오늘의 처지에서 보면 얼마나 초라한가. 차라리 환상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선생은 지적하고 있군요. <역사의 끝장> 이후의 세계에서는 박태원의 복권은 물론 무수한 박태원들과 그 논의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형편 아닙니까. 문학사가 : 현장성 (3)이 지닌 이러한 상대화야말로 작품이 지닌 <덧없음>이 아닐 것인가. 실상 위의 장면에서 작가 최인훈이 암시하고 싶은 것은 역사의식의 날카로움(구체성)보다는 그 덧없음에 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정말 최인훈이 『화두』에서 문제삼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것은 물을 것도 없이 현장성 (1)이지요. 다음 대목에서도 이 점이 확인됩니다. '해방전, H에서 살던 때 일이다. 어느 해 여름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친정에 가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친정은 작은 읍이었는데, 무슨 일로 두 사람은 거기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어머니와 나는 시골길을 걸어갔다. 날씨는 덥고 다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국민학교 3학년쯤이었던 나는 이미 업혀 가겠다고 할 나이는 아니었다. 한 쪽은 달래고 한 쪽은 투정을 부리면서 그러나 달리 어쩔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는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휭하니 앞질러 가 보기도 일부러 뒤처지기도 하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무어라 달래는 소리를 귓전으로 들어 가면서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나는 멈춰 섰다. 어느 사이엔지 어머니가 곁에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햇빛이 부신 한낮이었다. 나는 뒤처졌는가 싶어 시골길 풀이 우거진 모퉁이까지 달려갔다. 먼지가 하얀 흙길에는 눈 닿는 멀리까지 인적이 없었다.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지나온 길만 휑하니 멀리 그쪽에 보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그 하얀 시골길. 나는 그 자리에서 허둥거렸다. 그 때 바로 옆 풀숲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나는 달려가 매달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그러니까 투정부리지 말 것. 다시 그러면 이번에는 나를 놔두고 가 버리겠다면서 나를 달랬다. 우리는 남은 길을 그럭저럭 사이좋게 걸었다. 어머니가 없는 것을 알고 난 다음 그녀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의 사이, 그것이 아마 <영원>이라는 것이었던 듯싶다. 그런데 이 <영원>은 비어 있다. 나에게 나타난 영원의 형식은 비어 있음 이라는 모습이었다. 비어 있다고 해서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달려가서 풀숲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길의 저 앞쪽에 있던 철교와 그 밑으로 빠져 나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길이 지금도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뒤돌아가서 보았을 때 저쪽 숲 모퉁이로 사라지는 길 위에 하얗던, 바랠 줄 모르는 햇빛이 눈에 부시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방금 곁에 있던 어머니가 사라지고도 남음 있는 온갖 것들은 그 이전의 것들이 아닌 낯선 것들이었다. 나 자신조차도 바로 전까지의 내가 아닌 누군가였다. <없다>는 느낌은 직전까지 있었던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던가 싶다. 지금 있는 뭇사물은 그 바로 전까지의 꼬리를 조금은 달고 있어야 자기가 지금 있다고 느끼지, 그 꼬리를 갑자기 잘라서 어딘가 숨겨 버리면 그 순간 자기를 잃어 버리는 모양이다. 자기가 없는 곳 - 그보다 더 <비어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화두』, 제1부, pp.282-283) <길 잃음>으로 요약되는 장면. <지금/여기>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나는 장면. 이를 두고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한 순간 찾아오는 이 아득함. 홀연 세계의 낯섦 앞에 마주하기. [광장]을 지나고,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를 지나고,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까지 헤매고, 바야흐로 이순(耳順)에 이른 작가 최인훈은 여전히 <길 잃음>에 알몸을 통째로 드러내 놓고 있지 않겠는가. 이를 두고 표현자의 생명 의식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슨 부름이 적절할까. 적어도 저에겐 현장성 (3)이 현장성 (1)에로 환원되는 사례로 『화두』가 빛나고 있습니다. 비평가 : 오늘은 여기서 멈추어야 되겠습니다.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으니까. 문학사가 : 고맙습니다." 어떻습니까. 한 대목을 따온 것이라 어수선하지만, 이 속에 제 화두가 깃들어 있습니다. 6.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문학했던 것 연구자에서도 비평가에서도 벗어나기, <시체 빌어주기>·<묘지기 신세>에서 벗어나기란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하면 표현자의 반열에 나아갈 수 있을까. 제 스스로 육체를 버리기가 그것일까. <머나먼 울림>과 <선연한 헛것>에서 소멸되기일까. 이것이 제 화두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화두가 그러하듯 그것이 <절대 모순성>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절대 모순성을 그대로, 그러니까 통째로 받아들이기밖에 묘수는 없는 것일까. 이렇게 아직도 뻗대어 보며 몸부림이라도 쳐야 인간스러울까. 이 물음을 대하고 한밤중 홀로 앉아 있자니, 서재 한귀퉁이에서 무슨 기척이 들리지 않겠습니까. 시체들이 즐비한 곳에서 무슨 기척이 들리다니. 정신을 수습하여 귀를 기울이자니, 기척은 다름아닌 제가 쓴 책들에서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보니 저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제가 만든 피조물인 그들이 어느새 사물의 세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저를 아주 불쌍한 듯이 바라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기묘한 체험이란 무엇인가. 망연자실하여 멍청히 있자니, 문득 다음 시 한수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해온 [한국 근대문학의 이해] 강의에서 종강 무렵이면 늘 학생들과 함께 읊던 그 싯구. 한때 그토록 휘황했던 빛이 영영 내 눈에서 사라졌을 지라도 들판의 빛남, 꽃의 영화로움의 한 때를 송두리째 되돌릴 수 없다해도 우리는 슬퍼 말지니라.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에 (W. 워즈워스, [어린시절을 회상하고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 일절, 대의) 감추어진 힘이란 무엇일까요. 제멋대로 해석해 봅니다. 연구자로, 비평가로 제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했다면 그것이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서 힘이 되어 시방 저녁놀 빛, 몽매함에 놓인 제게 되돌아오고 있지 않겠는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표현자의 세계에로 나아가게끔 힘이 되어 밀어주고 있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이르면 저는 말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예언자가 없더라도 이제는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것도 같다고. 관악산의 무궁한 발전과 여러분의 앞날에 평안이 깃드시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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