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대통령의 글씨

입력 2001-09-07 18:35수정 2009-09-1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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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중에서 전국 곳곳에 현판과 비문을 가장 많이 남긴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이다. 종이에 쓴 글씨를 현판에 새기는 작업은 각자장(刻字匠)의 몫이다. 인간문화재 106호 각자장 오옥진씨는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씨 등 다섯 대통령의 글씨를 현판에 새겨봤다. 박 대통령 글씨의 현판은 무려 23개나 제작했다. 오씨는 “박 전대통령이 손재형씨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서예에 공을 들였지만 솜씨는 시골 선비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오씨에 따르면 해방후 역대 대통령 중에서 서예 솜씨만 놓고 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으뜸이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김충현씨로부터 지도를 받아 당나라 때의 서예가 안진경(顔眞卿) 체를 제대로 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최규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의 글씨는 별로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글씨와 대통령의 직무수행 능력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니 전두환 전대통령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서운해 할 것도 없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글씨를 즐겨 쓰는 김영삼 전대통령은 서예전을 여러 차례 열었지만 글씨 자체가 좋아서 사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많이 쓴 김대중 대통령의 글씨도 그저 그런 편이다. 김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의 글씨가 전국의 명소를 뒤덮은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천공항에 휘호를 남겨달라는 요청도 사양했다. 김 대통령 스스로 글씨의 수준을 낮게 평가해 그랬더라도 잘한 일이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의 지도자가 예능 부문에까지 만능일 필요는 없다.

▷이무영 경찰청장이 ‘國民(국민)의 警察(경찰)’이라고 쓴 김 대통령의 휘호를 전국 파출소에 내걸도록 해 논란이 일고 있다. 김 대통령이 작년 3월 경찰대학 졸업식에서 전달한 휘호라고 한다. 전두환 전대통령 퇴임 후에는 사라진 관행을 경찰 총수의 과잉충성이 부활시킨 모양이다. 정성스럽게 액자에 담아 걸어놓았지만 ‘國民’과 ‘警察’은 초서체(草書體)로 흘려 쓴 글씨여서 파출소에 드나드는 민원인들 중에 읽을 줄 아는 이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황호택논설위원>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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