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왜곡교과서 수정 거부에 대한 우리학계 반론

  • 입력 2001년 7월 9일 18시 33분


일본 정부가 내놓은 ‘역사교과서 검토 결과’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고수하고 있으며, 한국사를 비하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측 주장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국내 학계와 전문가로부터 들어본다.

▽일본이 임나(任那)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임나일본부설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 정설로 채택된 적이 없다. 아무리 단정적 표현을 피한다고 해도 이런 가설을 역사교과서에 소개하는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잘 알면서도 굳이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이를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설정하려는 의도다.

▽신라와 백제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일본측에서는 ‘일본서기’의 기술과 일부 중국 사료 등을 근거로 신라와 백제가 실질적으로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주장하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문화가 일본 야마토 문화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정설로 굳어져 있다. 이들 삼국이 문화적으로 하위에 있던 나라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장군이 바뀔 때마다 조선통신사가 에도(江戶)를 방문했다〓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일본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장군은 집권후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요청했다. 이를 무시한 채 그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왜곡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속국’이란 단어는 무력에 의한 강압에 의할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조선이 중국의 무력에 못 이겨서 조공을 바쳤던 것은 아니다. 중국과 조선은 천자와 제후국가의 관계였고, 제후국가 중에서도 독립적 성격이 매우 큰 나라였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일본은 중화질서 밖에서 자유로웠다〓에도시대에 이미 중국과 책봉 및 조공 관계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일본이 자신들을 동아시아 질서로부터 분리하려는 의도적 서술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중국과 조선 등과 연관된 동아시아 질서 안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이 개국을 거부해 정한론이 대두됐다〓한 국가가 상대 국가의 조약 요구를 거부했다고 해서 정벌론이 대두됐다는 것은 그 조약 요구가 본래 침략을 염두에 둔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일본이 기존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사실을 서술하지 않고 교섭 결렬만을 밝히고 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유색인종의 승리다〓일본측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시아 인민에게 희망을 준 면이 있으며 이 전쟁 결과가 서양에 큰 충격을 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러-일전쟁은 백인들간의 전쟁에 일본이 대리인으로 나선 것이며, 일본의 승리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일본의 승리를 유색인종의 승리로 보는 견해는 일본과 일부 친일파의 견해일 뿐 아시아인의 일반적 견해는 아니다.

▽일본은 조선을 개발했다〓일본은 한국합병 후 토지개량 철도부설 등을 통해 조선을 ‘개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조선을 위한 개발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식민지 수탈을 위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단적으로 일본에서 들어온 자금의 몇 배에 달하는 자금이 일본으로 반출됐으며 여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물자 인력까지 포함한다면 이는 분명히 ‘개발’이 아니라 ‘수탈’ 정책이었다.

▽태평양전쟁때 지원병제도가 실시됐다〓형식적으로는 ‘지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더라도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무력적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무력에 의한 강제 징병을 ‘지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처럼 잘못 비칠 수 있다.

▽군위안부 관련 내용 누락〓단지 “어떤 역사적 사실을 취급할지 말지는 집필자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기술을 요구할 수 없다”고 해명한 것은 너무 무책임한 자세다.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감추고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형찬·김수경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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