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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30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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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월 체결된 생물무기 금지협정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이라크 이란 리비아 북한 등 143개국이 비준했다. 서명조차 하지 않은 나라는 이스라엘 등 34개국이다. 1975년 3월부터 시행된 이 협정은 생물무기의 개발, 생산, 비축을 전면 금지하고 있으나 불행히도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이가 빠진 신사협정에 불과한 셈이다.
협정 이행을 검증하는 장치가 누락된 까닭은 1970년대 초에 생물무기가 군사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인 1973년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출현해 유전공학의 시대가 열림에 따라 탄저균, 천연두균, 콜레라균 등 각종 세균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생물무기는 핵무기 못지 않은 인명 살상 능력을 갖고 있다. 탄저균의 경우 100㎏을 맑고 깊은 밤 대도시 상공 위로 저공 비행하며 살포하면 100만∼300만명을 죽일 수 있다. 1메가톤의 수소폭탄에 맞먹는 살상 능력이다. 게다가 생물무기는 핵무기와 달리 제조하기 쉽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전략적 병기로 크게 손색이 없다. 생물무기를 ‘가난한 사람의 원자폭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생물무기는 유전공학의 발달로 웬만한 수준의 전문가이면 누구나 개발할 수 있으므로 세균전뿐만 아니라 사보타주, 요인 암살, 폭동 진압, 테러행위, 농작물 파괴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작전에 사용될 개연성이 갈수록 농후해지고 있다.
생물무기의 위협이 증대되는 가운데 생물무기 금지협정을 명백히 위반한 사례가 두 차례 발생했다. 옛소련과 이라크가 생물무기를 개발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1979년 소련의 한 도시에서 탄저균으로 70여명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1992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탄저균이 생물무기를 개발하던 군사시설에서 누출된 것이었음을 시인했다. 소련의 생물무기 연구기관 간부를 지낸 인물이 변절해 미국에서 폭로한 진상에 따르면 1990년 소련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각종 세균무기 개발에 6만여명이 투입되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생물무기를 비축한 사실이 밝혀졌다. 사담 후세인 정부는 1989년부터 생산을 개시한 탄저균 등 1만1000파운드 이상의 세균을 운반할 수 있는 25개의 미사일 탄두를 준비한 것이다. 이와 별도로 3만3000파운드의 세균을 비행기로 살포하기 위해 폭탄 속에 넣어두었다. 후세인이 바그다드 상공에 핵폭탄을 폭발시키겠다는 미국의 경고에 굴복하지 않고 이 세균무기를 실전에 배치했더라면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 못지 않게 인명을 살상했을 것이다.
1995년 미국 중앙정보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17개국이 생물무기를 연구하거나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 이란 리비아 이집트 이스라엘 등 중동국가와 러시아 중국 대만 북한도 나란히 들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물무기 금지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검증 절차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5년 1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협상이 시작됐으며 6년간의 협의 끝에 올 11월까지 의정서의 최종안이 확정될 예정이다. 그러나 5월초 미국이 의정서 초안에 반대 의사를 내비쳐 원점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협정 위반국의 속임수를 색출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생명공학 정보가 노출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의정서가 발효돼 미국의 생명공학 시설에 대한 현장조사가 수시로 실시되면 값비싼 산업기밀이 유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물무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량 살상 병기임과 동시에 생물학의 불명예이다. 부시 행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끝내 검증의정서를 거부해 6년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답게 수용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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