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요즘 가장들은-하]"남편 권위 이젠 옛말"

  • 입력 2001년 5월 25일 18시 32분


지방 6급공무원으로 일하다 98년 명예퇴직한 김모씨(54)는 퇴직후 아내와 역할이 뒤바뀌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야간대학에 다니며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퇴직후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구입해 시골 재래시장이나 거리에서 팔아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수익은 없었다.

▼글싣는 순서▼
- <상>"아버지는 외롭다"
- <하>"남편 권위 이젠 옛말"

그러다 아내가 보험설계사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 지난해 초. 월 120만원 정도를 벌어오는 아내가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김씨는 요즘 동네 친구들과 등산을 하고 복덕방에 모여 잡담을 하거나 고스톱 등으로 하루를 보낸다. 요리는 못해도 빨래나 설거지 청소는 자연스럽게 그의 몫이 됐다.

▼"김치까지 담가요"▼

모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다 퇴사한 이모씨(41)도 비슷한 경우. ‘나가주면 좋겠다’는 분위기에 밀려 사직서를 냈다는 이씨는 퇴직금 2억여원으로 동네에 만화방을 차렸다. 생각보다 영업이 잘돼 한달에 300여만원의 수익을 내고 있다. 운영은 아내의 몫. 싹싹한 아내가 손님관리를 잘해 운영에 별 어려움이 없다.

▼자발적 전업 '主夫' 늘어▼

처음엔 몇차례 취직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문턱에서 좌절되자 만화방 문을 열어 청소를 해주고 집안일을 하는 게 일과가 됐다. 시장도 가고 반찬도 사오고 이제는 김치까지 담글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아이들 도시락도 챙겨준다. 그는 “새로 직업을 갖느니 이렇게 아내 일을 도우면서 살고싶다”고 말한다.

경제난으로 실직한 남편들은 재취업에 실패하고 아내들이 대신 취업전선에 나서다 보니 가정일이 전업이 된 사례가 늘고 있다. 요즘에는 아예 돈벌어오는 아내를 뒷바라지하는 ‘자발적 남자 주부’도 늘었다. ‘남편은 직장일, 아내는 가사’로 이해돼 왔던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분담 모습은 이제 다양한 유형의 역할바꾸기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주부 남편들의 등장은 직장을 잃은 40∼50대 중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아예 ‘능력있는 마누라’에 기대어 직장생활을 포기하는 20∼30대 젊은 남편들도 등장하고 있다.

신세대 부부들 사이에선 더 이상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고 여자는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통념은 통하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한국 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사이버 토론회에 참여한 젊은 네티즌들의 73.3%가 이상적 부부모델로 ‘남녀 모두 취업을 하고 가사는 공평하게 분담하는 부부’를 꼽았을 정도다.

아내 일을 돕는 ‘외조 남편’들도 등장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퇴직한 김모씨(29)의 아내는 결혼메이크업을 전문으로 하는 웨딩사업가.

백수로 3개월을 놀다가 본격적으로 아내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무거운 카메라를 지고 다니는 일을 하다가 요즘엔 아내에게 사진촬영법을 배우고 있다. 아내도 만족하는 눈치다. 집에서 빨래나 청소, 아이들 유치원 데려다주는 일도 그의 몫. 남는 시간에 사진촬영법을 배우러 다니고 아내에게 용돈을 타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사는 생활에 그는 대단히 만족해한다.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양정자(梁貞子·57)원장은 “아버지들이 흔히 가장의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며 “오히려 아버지들이 가장의 권위라는 고정된 사고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도록 아내나 아이들이 먼저 마음을 여는 개방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통적 역할분담 깨져▼

연세대 김현미(金賢美·사회학과)교수는 “경제구조가 다양해지면서 자녀와 부모, 선생님과 제자, 직장 동료간 등 모든 관계가 바뀌고 있는 요즘에 아버지만 기존의 정형화된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러한 변화를 다양성과 유연성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민동용·최호원·김창원기자>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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