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사업방식 바뀐다…그룹 '의리'보다 '내실' 최우선

입력 2001-03-23 18:38수정 2009-09-21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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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 창업자의 카리스마가 차지한 비중은 다른 그룹보다 훨씬 컸다. 그런 점에서 정주영 회장의 별세는 현대 계열사들에 상실감 못지 않게 또 다른 반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4대그룹의 한 임원은 23일 ‘정주영 이후’ 현대의 진로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앞으로 계열사간 정서적인 유대감은 급격히 엷어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 하지만 창업자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시장 중시의 새로운 경영패턴이 자리잡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룹보다 기업’ 중시〓외환위기 이후 30대그룹 가운데 절반이 넘는 16곳이 법정관리 화의 워크아웃 등으로 재벌 반열에서 탈락했다. 한보 기아 대우의 붕괴로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깨지자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업 구조를 수익성 위주로 재정비하고 의사결정 방식에도 대수술을 시도했다.

유능한 전문경영인을 앞다퉈 영입하면서 창업 3, 4세대를 중심으로 오너 일가의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작업도 서둘렀다.

사람이 바뀌면 사업 추진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게 마련. 시장의 힘이 커진 것에 비례해 그룹들은 저마다 주주중시 경영을 내세웠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가장 큰 변화는 그룹에 대한 소속감보다 개별 기업을 중시하는 관행이 확산된 것”이라며 “그룹공동체 의식이 엷어지면서 계열사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해 시행하는 책임경영체제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외국 금융기관에서 빌린 자금에 대한 지급보증 문제를 놓고 현대중공업과 현대전자가 소송을 벌인 것이 대표적인 예. 오너 회장이 어려움에 빠진 계열사를 도우려 해도 해당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반대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는 삼성차 부채를 계속 떠맡을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 됐다. “오너의 경영 실패에 따른 뒷감당을 왜 계열사와 주주들이 떠맡아야 하는가”라는 참여연대의 공박은 상당수 소액주주들의 공감을 얻었다.

▽재벌 체제의 미래상〓계열사 가운데 장사가 안돼 어려움을 겪는 곳이 있으면 현금을 넉넉히 갖고 있거나 돈을 좋은 조건으로 빌릴 수 있는 우량 계열사가 도와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하지만 그룹차원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어지자 기업들은 덩치 불리기를 포기한 채 내실을 다지는 데 힘쓴다. 혈연을 매개로 한 전근대적인 그룹 체제는 느슨한 유대감은 유지하되 계약을 중시하는 관계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외관만 바뀌었을 뿐 속내를 들여다보면 총수의 황제경영 행태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장하성 위원장은 “재벌의 선의만으로 지배구도가 투명해지기를 기대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도 깊다”고 지적했다.일각에서는 재벌 체제의 급속한 붕괴가 빚을 역작용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제기한다.새로운 사업에 뛰어들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그룹 구조가 갑작스레 붕괴될 경우 신산업 진출의 기회가 봉쇄돼 전체적인 경쟁력에도 타격이 생긴다는 것.대우의 몰락과 현대의 위기에서 드러났듯 재벌의 변화는 시대적 대세다. 창업 1세대가 사라진 지금, 재벌의 미래지향적인 변신은 결국 2, 3세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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