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황태자 1907년 방한"

  • 입력 2001년 1월 30일 19시 03분


◇하락교수의 '다이쇼천왕'가려진 日역사 파헤쳐

일본인들이 역사 속에서 지우고 싶어하는 다이쇼(大正) 천황(1879∼1926)의 가려진 역사를 파헤친 책 ‘다이쇼 천황(大正天皇)’이 아사히(朝日)신문사에서 발간돼 일본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필자는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 국제학부 하라 다케시(原武史) 교수. 그는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직소(直訴)와 왕권’(지식산업사)의 저자이기도 하다. 메이지(明治) 천황과 쇼와(昭和) 천황을 다룬 연구는 대단히 많은 데 비해, 두 천황 사이에 재임했던 다이쇼 천황을 정면으로 다룬 연구는 흔치 않다.

하라 교수는 이 책에서 다이쇼 천황이 일본 군국주의 체제의 확립에 방해가 돼 즉위 14년만인 1926년 쇼와 천황에게 강제로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내에서 천황제를 옹호하는 우파나 반대하는 좌파들이 모두 세 천황의 차별성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면서 “다이쇼 천황의 실상이 밝혀져야 일본 군국 주의의 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라 교수에 따르면 당시 실권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보기에 다이쇼 천황은 국내외적으로 왕권정치와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발흥하던 이 시기의 ‘위기상황’에 대처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성품에 감성이 풍부했던 다이쇼 천황보다 메이지 천황처럼 과묵하고 카리스마가 강한 천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 때 주목받은 사람이 당시 다이쇼 천황의 큰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쇼와 천황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1926년 다이쇼 천황은 정신이상이 생겨 공무집행이 어렵다는 궁내성(宮內省)의 공식발표와 함께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는 카리스마적 군주로 교육받은 쇼와 천황에게 승계됐다. 권좌에서 물러난 후 다이쇼 천황은 전국 각지의 황실전용 별장을 돌아다니며 요양을 했다고 기록돼 있을 뿐 행적이 불분명하다.

하라 교수는 당시 궁내(宮內) 대신, 통역관, 집사, 시중 등의 기록을 토대로 이 사라진 역사를 되찾고 있다.

“다이쇼 천황은 양위 직전까지 한국어에 흥미를 가지고 공부했고, 주위 관료들에게 양위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표시도 했습니다. 이런 예만 봐도 그의 정신에 이상이 있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라 교수에 따르면 다이쇼 천황의 퇴위와 쇼와 천황의 즉위 과정은 곧 일본 군국주의체제의 확립 과정이었다. 천황이 가는 곳마다 수 만 명 단위로 사람들이 집결해 ‘기미가요’(국가)를 제창하며 환호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라는 것.

현재의 천황제는 ‘정부의 이미지 조작에 의한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 하라 교수의 결론이다.

한편 이 책은 다이쇼 천황이 황태자 시절인 1907년에 메이지 천황을 대신해 방한, 당시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영친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는 이야기 등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도 수록하고 있다.

<도쿄〓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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