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노금석씨

  • 입력 2000년 12월 4일 18시 28분


“소련제 제트 항공기 한 대가 철의 장막을 무난히 뚫고 자유한국에 귀순해 옴으로써 지난 4월 마크 크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포고한 바 미화 10만불의 상금과 정치적 망명권을 부여받을 첫 번의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1953년 9월21일 미그15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공군대위 노금석씨(당시 21세)에 대해 동아일보는 그 다음날인 22일자에 이같이 보도했다.

▷노씨가 귀순한 지 이틀이 지난 23일자 동아일보는 노씨의 사진과 함께 기자회견내용을 크게 실었다. 노씨는 자기의 귀순은 10만달러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며 “앞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미국같은 곳에서 받아가지고 대한민국을 위해 이바지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 언론들은 “노씨가 은색의 미그제트기로부터 나오면서 견장을 떼었으며 괴뢰 김일성사진이 붙은 신분증을 밖으로 던지고 미그기로 달려간 미군조종사의 손을 잡았다”는 등 김포공항 착륙상황을 자세히 묘사했다.

▷노씨의 탈출보다 3년여 빠른 1950년 4월 이건순 북한군 중위가 일류신 10기를 몰고 김해공항에 착륙했으나 그때는 6·25전쟁 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관심은 끌지 못했다. 그러나 노씨가 탈출했을 때는 휴전된 지 얼마되지 않아 ‘제주도지구 군사책 공비 김상훈사살’이라는 기사가 함께 실리던 시기였다. “나는 공산주의를 떠나게 되어 대단히 기쁘다”는 그의 탈출 소감이 ‘멸공반공교육’의 산 교재가 될 수밖에 없던 때였다. 여기에다 노씨가 받은 10만달러의 상금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거액이었다.

▷그런 노씨가 최근 A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초로의 모습을 나타냈다. 6·25전후세대들에게는 그의 탈출당시 모습이 아련한 과거의 한 단상처럼 다시 떠오른다. ‘켄 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노씨는 미국시민권을 얻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고 한다. 델라웨어 공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듀폰사 등 방위업체에 근무하다 올해 퇴직했다는 것이다.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오가며 만나는 지금의 고국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그의 감회는 어떨까.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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