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나연/‘퇴출 결정’ 눈가리고 아웅

  • 입력 2000년 11월 5일 18시 36분


‘11·3 부실기업 퇴출 명단’이 발표되던 3일 서울 은행회관.

예고된 발표시간인 오후4시가 되자 11층 대회의실엔 은행장 14명이 나란히 앉았다. 이윽고 은행간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신용위험평가협의회’ 간사인 한빛은행의 김진만행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퇴출명단’을 담담히 읽어 내려갔다.

은행간 자율결정임을 강조하려는 듯 금융감독원 등 타기관 사람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금감원은 퇴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을 뿐 철저히 ‘은행단의 자율에 맡긴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한빛은행장이 읽은 자료는 2시간 전 금감원에서 E메일로 보낸 것이었다. 한빛은행은 이 자료에 단 2줄을 더 넣었다. ‘보도자료’ 문패와 ‘이 자료를 언제부터 사용해주십시오’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금융감독원의 발표라고 해야 옳았다.

이 과정에서 퇴출기업 분류에도 혼선이 생겼다. 갑을과 갑을방적의 경우 주채권은행은 ‘워크아웃 진행 뒤 합병을 통한 회생기업’으로 분류했으나 보도자료엔 ‘합병’이라고만 적시됐다. 일부에선 은행의 처리방침과는 정반대로 ‘정리대상 합병’으로 보도됐다.

한빛은행은 “은행이 제출한 자료를 금감원이 취합, 재조정해 최종 결과는 모른다”며 두 기업은 회생으로 분류됐다는 추가 자료를 낼뿐이었다.

동보건설은 청산에서 법정관리로 공개 수정됐다. 주채권은행인 주택은행 관계자는 “법정관리를 염두에 두고 금감원에 ‘회사정리절차’로 보고했으나 이를 금감원이 잘못 이해해 ‘청산’으로 분류했다”고 해명했다. 현대건설의 처리방침은 ‘감자후 출자전환 동의서 사전 징구’로 발표됐다 주채권은행이 재차 기자회견을 열고 부인하기도 했다.

물론 극비에 진행하다보니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금감원이 다 조정해놓고 책임을 피하기 위해 발표를 떠넘겼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주장하는 은행 관계자들의 얘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이나연<금융부>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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