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정지용 미스터리

  • 입력 2000년 10월 29일 18시 56분


한국 사람들은 시를 많이 읽는 민족이다. 외국에서는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우리는 수십만부씩 팔리는 시집이 적지 않다. 80년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100만부가 넘게 팔리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다소 수그러들긴 했어도 여전히 시집은 서점에서 ‘터줏대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인에 대한 존경심도 남다르다. 지하철역에 가도 큰 글씨로 시가 걸려 있는 곳이 한국이다.

▷시가 이처럼 사랑을 받는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恨)으로 대변되는 민족정서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 특유의 한을 표현하자면 여러 말보다 한 편의 시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됐던 일제 강점기에는 특히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등장했다.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 등이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시를 통해 민족의식 등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수확’이 있다면 모국어를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역시 일제 치하의 시인이었던 정지용은 88년 해금조치 전까지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다. 6·25 때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40년 가까이 배척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북한에서 날아온 북측 이산가족 명단을 보면 그가 과연 북으로 갔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북한에 있는 아들이 ‘남한에 있는 정지용을 찾는다’며 상봉신청을 했으니 말이다. 북한으로 갔다는 정지용을 북한에 있는 아들이 모른다니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특히 이 명단은 북한이 작성해 내려보낸 것이다. 이 자료가 내부 검증 절차를 거친 것이라면 북측은 정지용이 과거 북한에 있었던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며, 그렇지 않다면 북한의 이산가족 검증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연 진실은 어떤 것일까. 만약 정지용의 정확한 행적도 모른 채 그를 반세기 동안이나 우리 문학사에서 지워놓았다면 그것은 ‘큰 시인’에게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홍찬식 논설위원>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