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루머에서 정현준까지

  • 입력 2000년 10월 27일 18시 41분


세계 영화의 메카라는 미국 할리우드에는 매년 2만여명의 배우지망생이 몰려든다고 한다. 스타탄생을 꿈꾸는 인파 가운데 단역이라도 구해 로스앤젤레스 언저리에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은 200명 안팎으로 지망생의 1%에 불과하다. 그리고 조역 이상의 스타가 되어 그야말로 ‘배우입네’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기서 다시 10분의 1로 줄어 20여명에 그친다. 전체 배우지망생의 0.1%만이 등용문을 통과한다는 얘기다.

이 확률은 우연히도 우리나라의 특허관련 통계와 유사하다. 특허청 간부한테 듣기로는 국내에서 출원되는 연간 8만여건의 특허 가운데 실제 상품으로 만들어져 그런대로 시장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팔리는 것은 연간 800여건이고 히트상품이 되는 것은 80개 이내라고 한다.

미국 할리우드와 우리 상품시장에서 성공할 확률 0.1%라는 것은 눈을 감은 채 1000개의 하얀공 가운데 1개밖에 없는 빨간공을, 그것도 단 한번에 잡아내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벤처성공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나라에서 벤처로 아이디어가 나온 후 낙오되지 않고 나스닥 근처까지 진출해 사업을 꾸려나갈 가능성은 10만분의 6이고 막상 나스닥에 등록까지 하는 기업은 100만분의 6이라고 한다. 운석에 맞아 죽을 확률에 가까운 것이라면 통계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어진다. 우연이라고 보는 편이 패자에게는 차라리 마음 편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정부당국이 인용하는 벤처기업의 성공률은 5%이다. 미국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높은데 과연 그들보다 우리쪽의 아이디어와 기술이 훨씬 출중하고 사업수완이 특출나기 때문인가.

국내 정보통신 업계의 잘 나가는 한 최고경영자(CEO)는 정색을 한다. “천만에요. 미국은 엄격하고 우리는 허술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미국은 투자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규제가 철저한 반면 우리나라의 벤처기업은 정부가 선두에 서서 그야말로 온갖 온실속 지원을 해대며 ‘오냐 오냐’ 키우는 양육의 대상이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우리처럼 몇 년 내에 몇 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식의 정책을 쓰는지는 모른다. 벤처지망생들이 흥이 나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기술개발을 할 수 있도록 주변여건을 만들어주면 될 성싶은데 어쩌다가 정부가 앞장서서 붐을 조성해서 온 국민을 벤처로 들뜨게 했는가. 그러다 보니 벤처투자했다가 ‘쪽박’을 찬 많은 국민에게 정부는 원망의 대상이 됐다. 자기책임아래 투자를 하는 것이라지만 잔치판을 벌여 음식냄새를 풍긴 쪽에 눈길이 고울 리 없다. 대충잡아 전체 가구 가운데 절반이상이 주식투자를 했다니 만나는 사람마다 정부에 대고 한마디씩 하는 것이 당연스러워 보인다.

쪽박도 보통 쪽박인가. 어떤 벤처주식을 예로 들면 액면 500원짜리가 한창 잘나갈 때 40만6500원에서 요즘은 3만원 수준이다. 투자자 가운데 최대 94%를 잃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인데 이런 경우가 코스닥시장 안에 하나 둘이 아니다. 거품이 꺼져가는 과정이라면 이 거품을 조장한 주인공은 누구인가.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까 지난 연초에 나돌았던 흑색 루머 하나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루머를 공개해 정치권을 욕되게 할 생각이 없으니까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떻게 그 루머가 예언한 대로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3월중 코스닥이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고 4월초부터는 슬슬 빠지며 총선후에는 폭락할 것이라는 연초의 예언은 무슨 근거로 나왔으며 어떻게 이처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을까.

폭락장세가 연출한 것이 ‘정현준 사건’이다. 이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책이 그렇게 허술할 수 없다. 하기는 감독당국의 간부들이 연루되어 있다니 제아무리 제도를 잘해 놓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세상이니 코스닥시장에 작전세력이 달라붙고 주주가 ‘맡긴’ 돈을 흥청망청 퍼 쓰면서 매명에만 앞장서는 불량 벤처인이 범람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괴이한 루머와 거의 그 루머대로 움직여 온 시장, 그리고 정현준의 정경유착사건을 놓고 보면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 그림 속에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의 형상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

<이규민 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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