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슬픈 '게임의 법칙'

  • 입력 2000년 10월 15일 18시 26분


13일과 14일 한국의 주요 언론은 예외 없이 평화와 전쟁을 함께 다루었다. 신문들의 1면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평화의 뉴스’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소식’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그러나 24시간 내내 전세계에 뉴스를 전하는 미국의 CNN방송은 평화와 전쟁을 완전히 뒤바꿨다. CNN은 13일 오후 6시 군나르 베르게 노벨위원회 위원장이 김대통령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발표를 하는 장면을 잠시 생중계하더니 즉시 카메라를 중동으로 돌려버렸다. 예멘의 영국대사관에서 발생한 폭발사건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현장 소식이 숨가쁘게 전해졌다. CNN은 아낌없이 시간을 할애, 걸프전 코소보전 등에 이어 또 한번의‘전쟁 중계’를 고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짧은 평화의 뉴스와 긴 전쟁 소식.’ 이 같은 대비는 12일 오전 미 국무부에서도 연출됐다. 북한과 미국의 역사적 공동 성명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브리핑룸에 등장했다.

북―미 공동성명은 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장관의 평양방문 계획 등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세계의 평화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미국으로서는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마지막 냉전의 땅인 한반도의 북쪽을 찾아가게 됐다는 합의에 당연히 흥분해야 했다.

그러나 올브라이트의 브리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북―미 공동성명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브리핑 직전 발생한 미 구축함 피격소식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주인공이 됐다.마감시간에 쫓기는 한국특파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지만 올브라이트는 미국 기자들의 계속된 질문에 시달리다 마지막에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아마도 10월말 북한을 방문할 것이며 북한을 방문하면 양국의 여러 현안을 논의하겠다는 답변 한마디만 하고 브리핑을 끝냈다.

두 가지 사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CNN은 자사 카메라가 비추는 곳이 세계의 얼굴이라고 강요한다. CNN 카메라가 전쟁을 오래 비추면 세계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싸움과 테러가 계속되고 있지만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제정된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가 발표된 순간만이라도 평화를 강조해 전쟁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하고자 하는 자제력이 CNN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국무장관이 오래 거론하는 문제도 세계의 관심사다. 그가 전쟁을 얘기하면 세계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비록 엄청난 평화의 가능성이 눈 앞에 있지만 미군이 몇 명 죽은 테러가 있으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미국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인정하기는 괴롭지만 이것이 이미 하나로 묶여진 현재의 지구촌을 구속하는 ‘게임의 법칙’이다.

알프레드 노벨은 “국가간의 우호와 군비의 축소 또는 제거, 평화회의의 유치 또는 증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평화상을 시상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국 정부와 CNN은 무서운 다이너마이트 발명을 평화상으로 승화시킨 노벨의 정신을 잠시나마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방형남<국제부장>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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