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현장21] "촌사람들은 병걸려 죽어도 됩니까?"

  • 입력 2000년 10월 6일 11시 18분


"선생님 언제쯤 돌아오죠?"

강원도 홍천군 남면 주민들은 서울로 '파견'간 보건지소 '의사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의료계 2차 폐업이 한창이던 지난 8월 14일 이후 인구 8000여명의 전형적 농촌마을 남면에서는 단 한사람의 의사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보건복지부가 의료계 폐업에 따른 '공백'을 메운다며 남면에서 하나뿐인 공중보건의를 서울로 차출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복지부 지정 '의약분업 예외지역'으로 선정된 남면에는 개인의원 두곳이 있었으나 의료계 폐업 당시 모두 문을 닫았다. 젊은이가 없는 농촌마을에서 환자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층.

이들은 15㎞ 떨어진 홍천보건소를 찾아가느니 차라리 공중보건의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진료의 손길만 기다린 채 질환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공의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남면 마을은 10월 들어 완벽한 '의료 사각지대'가 되어버렸다.

"두 달째 혈압과 혈당 수치를 재지 못했어요. 고혈압이 심해 며칠에 한번은 꼭 선생님과 의논을 했는데…어머니는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차서 이제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가급적 이동을 삼가라고 해 군(郡)으로 나가지도 못하겠고…"

▼8000여 주민 의사 한명도 없어▼

남면에 사는 이희정씨(여·80)의 며느리 지경순씨(49)는 공중보건의 파견 이후 이처럼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보건지소 직원이 이전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주지만 매일 상태가 달라지는 할머니는 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남면처럼 의사가 떠난 경기도 강화군에서 진료료원으로 일하는 A씨는 요즘 답답하기 짝이 없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데려올 때는 정말 눈물이 핑 돌아요. 제가 업고 군보건소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예전에 오셨던 만성질환자라면 처방전을 베껴서라도 약을 지어드리겠는데 신규 환자들은 어쩔 수가 없어요"

A씨는 막무가내로 약을 지어내라는 환자들의 등살에 이전의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 주지만 마음 한쪽은 항상 무겁다. 고혈압,당노병,퇴행성 관절염 등 만성질환자라도 상황에 따라 약의 종류와 양이 달라지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A씨에게도 의사가 없는 보건지소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다.

지난 8월 중순 의료계 2차 파업기간 보건복지부의 명령으로 남면처럼 농촌의 보건지소를 비워놓고 파견간 전국 시군의 공중보건의는 40여명. 대부분 의료계 폐업이 극심했던 서울과 대구지역으로 파견된 뒤, 10월 들어서도 9명은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짧으면 3~4일, 길계는 45일씩 파견이 진행되자 지방자치단체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물론 보건복지부에 이들의 귀환 건의도 쏟아졌다.

"서울 사람만 사람이고 촌사람은 사람도 아닙니까?"

경기도천 보건과의 한 관계자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것을 겨우 참았다며 아직도 도내 보건지소 공중보건의 중 4명이 국립의료원에 두 달째 파견중이라고 말했다. 경기도의 경우 8개 보건지소의 공중보건의가 지난 8월 14일자로 국립의료원과 포천의료원에 각각 4명씩 파견나간 후 포천의료원 인력만 파견 44일 만인 9월 27일 복귀했다.

이 관계자는 "농촌 사람들이나 대도시 사람들이나 진료받을 권리는 동등한데, 복지부가 산술적 계산에 치우쳐 의료자원의 효율적 분배만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고 복지부의 공중보건의 차출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이두성씨(75·가명)도 공중보건의 파견정책의 피해를 톡톡히 보고 있는 산간 오지마을 환자다. 천식과 기관지염 등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매주 수요일마다 방문 진료를 받아오던 이씨는 지난 8월 중순 이후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더이상 보지 못했다. 원곡면 보건지소의 공중보건의가 국립의료원에 파견된 의사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도시사람들이 더 많이 아프다는데 그리로 가야지. 나야 뭐…"

이씨는 "늙은이 병은 참으면 그만"이라며 못내 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의보대상자 노인환자 가장 큰 불편▼

의료계 폐업으로 인한 농촌 보건지소 공중보건의 파견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빚어냈다. 포천의료원에 파견됐다. 한달 반 만에 돌아온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보건지소 공중보건의 오성주시가 전하는 해프닝은 이런 것이다.

"진료요원(간호사)들이 찾아오는 의료보호대상자 환자에게 내가 예전에 처방했던 처방전을 들고 인근 의원에 가서 약을 타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군에 소문이 쫙 퍼졌더군요. 보건지소가 한 병원만 끼고 돈다고 야난났어요"

오씨는 농촌지역 공중보건의 파견으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로 의료보호 대상자나 65세 이상의 환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꼽았다. 이들의 경우 보건지소에서는 무료로 처방과 약을 받을 수 있지만 의원이나 병원을 찾을 경우 5000~1만5000원의 진료비(약값포함)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중보건의 파견에 동원됐던 대다수 의사들은 보건복지부의 파견정책이 '의료인력의 효율적인 분배'라는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국립의료원에 파견된 한 공중보건의는 '병원마다 시스템이 모두 다른데다 의료진끼리도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라 실질적인 진료는 기대하기 힘들다. 응급실 인력으로 투입되지만 만일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환자진료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결국 실효성 없는 공중보건의 파견정책은 의사들의 머릿수만 채워 의료폐업에 따른 따가운 여론을 무마해보자는 전시행정의 표본"이라고 비난했다.

"의료계 폐·파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환자들이 일시에 몰리는 대도시 공공의료기관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최대한 진료가 없는 현장에서 차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농촌지역에서 파견된 사례는 없을 겁니다. 거기가 뭐라했죠. 보건지소라고 그랬습니까?"

공중보건의 파견 실무를 맡은 보건복지부 보건자원정책과 담당자는 얼마만큼의 인력이 파견됐는지, 공중보건의가 있던 곳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의료계 폐업이 계속되는 한 공중보건의의 파견은 불가피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처럼 의료계 폐업은 도시민들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농촌주민의 희생을 방치하는 또 하나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의료계 폐업을 주도하는 의사들이나 농촌지역 공중보건의의 대도시 파견을 강요하는 복지부 공직자들에겐 농촌주민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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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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