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노벨상, 기대와 '저주' 사이

  • 입력 2000년 6월 15일 19시 29분


올해 노벨 평화상을 김대중대통령이 받을 수 있을까? 평양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나오는 얘기다. 김정일국방위원장과 함께 받게 되는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듣다 보면 화자(話者)의 의도는 대개 ‘꼭 그 분이 상을 받았으면’ 하는 열망 기대이거나, 아니면 ‘절대로 받아선 안되는데’하는 일종의 반감 ‘저주(詛呪)’로 확연히 갈린다. 섬뜩하다.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본다는 경우가 이런 것일 터이다. 상(賞)을 그저 상으로 보고 말하는 덕담이 아니라, 혐오스럽게도 그 노벨상을 받을 경우 뒤따를 수 있는 정치적 효과를 떠올리고, 원래부터 친DJ냐 반DJ냐로 쫙 나뉘는 꼴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평화상은 이 땅에서 괜스러운 불화(不和)의 소재가 되는 게 아닌가도 싶다.

▼정치력 확대와 연계 한심한 일▼

80년대 5공 정권 일각에서 최초로 ‘노벨상 따내기’ 프로젝트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한국인중에는 왜 노벨상을 받은 자가 없느냐는 신군부 장교들의 기개와 의욕의 반영이었다. 물론 헛된 꿈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바로 그 5공 정권은 86년 무렵 DJ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오르자 기를 쓰고 방해 공작을 폈다.

이 이상한 자해(自害)같은 공작에는 애꿎은 외교관들도 동원되었다. 당시의 한 외무부 간부 K씨가 푸념하던 말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제발 이북의 김일성이 부하들이라도 내세워 김대중이 노벨상을 못 받게 거들어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DJ가 상을 타게 되면 경을 칠 테니”라고.

왜 그리도 정권이 나서서 방해 공작을 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정권 안보 때문이었다. 당시 정권은 미국 정부가 건국기념일 행사를 이유로 가택 연금 상태인 DJ를 정동의 미국대사관저에 초청한 일을 외무부가 ‘저지’하지 못했다 해서 외무부 장관도 잘라 버릴 정도였다. 그 일로 DJ가 국민 사이에 미국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비쳐져 힘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노벨상이라도 타게 되면 정권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DJ진영 충성파들의 노벨상을 겨냥한 안간힘도 계속되었다. 미국 유럽을 비롯한 각지의 ‘DJ지부’가 총동원되어 유력 단체의 추천서를 받고 공적 자료를 노르웨이에 보내 수상 로비를 벌였다. DJ가 알았건 몰랐건간에 지금까지 12번 후보로 올라간 배경에는 이런 ‘눈물겨운’ 노력이 배어 있다. 민주당의 한 국회의원이 지난해 의사당에서 “김대통령이 탄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자 11명 가운데 5명이 노벨상을 탄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기염을 토했다. DJ진영의 열망의 반영이다.

노벨 평화상을 겨냥해 이런 식으로 처절하게 ‘깎아 내리기’ 캠페인과 치켜세우기 캠페인을 한꺼번에 벌이는 나라가 한국말고 또 있을까. 머나 먼 곳에서 줄지 말지도 모르는 노벨상을 둘러싸고, 그 상이 미칠 정치적 파급효과에 집착해 국회의사당에서까지 공개 발언으로 드잡이하는 것도 우리만의 현실 아닐까.

▼누가 받게 돼도 민족의 핏값▼

세계가 남북정상회담을 주목하고 김대중 김정일 두 정상을 인상깊게 지켜본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용단도 용단이지만, 더 깊게는 55년동안 불구대천의 원수로 싸워 온 단절의 역사가 있고, 망국(亡國)과 식민 지배라는 20세기 수난의 민족사가 깔려 있기에, 오늘의 남북정상 악수가 극적으로 비치는 것이며 아낌없는 갈채와 찬사를 받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만일에, 참으로 ‘만일에’ 누군가가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단순히 아무개 개인의 성취이거나 독점할 몫일 수 없다. 그것은 지난 한 세기 민족의 핏값이며, 겨레의 고통과 좌절 절망이 뒤엉킨 땀과 눈물의 결정(結晶)같은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상에 대한 기대도 ‘누구’ 또는 무슨 정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결부지어서는 불결한 짓이며, 나아가 정치적 호오(好惡)를 이유로 ‘노벨상을 절대 못 받게 하옵소서’라고 저주하는 것은 더더욱 죄악이다. 추태는 이제까지로도 족하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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