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Digital/법정에서]기지촌 여성이 '美軍 위안부'?

  • 입력 2000년 6월 7일 19시 02분


이태원 술집 여종업원을 목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미군 상병 크리스토퍼 매카시에 대한 공판이 열린 2일 서울지법 319호 법정.

죽은 자는 키 150cm에 몸무게 42kg인 가냘픈 한국인 여성.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매카시는 22세의 건장한 미군 청년이었다. 누가 보아도 정황은 분명했고 매카시는 간간이 눈물을 훔치면서 혐의사실을 대부분 인정했다. 매카시는 그러나 검사의 신문과 판사에 대한 최후 진술에서 “목을 조르면서도 김씨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살인죄가 적용된 그에게는 살인이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변론에 나선 매카시의 한국인 변호인은 ‘정당한 계약’과 ‘계약 불이행’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정당한 ‘화대’를 지불하고 성관계를 맺기로 했는데 피해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는 특히 접대부인 김씨를 가리켜 ‘위안부(慰安婦)’라는 표현을 몇 차례 사용했다. 이 ‘위안부’가 정당한 화대에 상응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결국 화를 자초했다는 것.

‘위안부’라는 그의 표현은 여러모로 부적절하게 들렸다.

위안부란 전쟁 때 군인들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된 여자들. 특히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인권을 유린당한 한국인 종군 위안부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와 끈질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이날 공판을 방청하던 시민운동단체 소속 여대생들은 매카시의 범죄혐의보다도 변호인의 ‘위안부’발언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변태적인 성관계를 요구했을지도 모르는 미군의 팔에서 빠져나가려던 한 한국여성이 이날 법정에서 또다른 ‘위안부’가 됐기 때문이다.

모든 형사사건에서 변호인은 의뢰인의 입장을 변호해 양형을 보다 가볍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민감한 사건에서 용어선택에 얼마나 신경을 써야하는지를 보여준 법정이기도 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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