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황제시대'가 남긴 것

  • 입력 2000년 6월 1일 19시 30분


인천 부두의 한 청년 근로자는 밤마다 빈대에 시달렸다. 더러운 숙소에는 빈대가 어찌나 많았던지 다른 근로자들은 편히 잠들기 위해 부둣가로 나가 노숙하곤 했다. 영리한 청년은 빈대 퇴치를 궁리하고 또 연구했다. 마침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밥상 위에서 자기로 하고, 그 밥상의 네 다리를 물대접에 담그는 방법이었다. 빈대가 밥상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수장(水葬)해 버리는 기법이었다.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빈대의 공격력이었다. 빈대들은 밥상 다리로 기어오르지 못하자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청년의 몸 위로 떨어지는 공수부대 방식으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정주영씨가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털어놓은 체험담이다. 빈대 같은 미물(微物)의 본능적인 공격력, 살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생존방식에 그는 느낀 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조그만 장애에도 머뭇거리고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빈대만도 못한’이라는 욕을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는 10대 때 세 번이나 가출을 시도했다. 뼈 빠지게 일해도 늘 배가 고픈 희망 없는 농촌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희망을 도회에서 찾기 위해 가출했지만 번번이 아버지에게 붙잡혀 돌아왔다. 그러다 19세에 네번째 가출에 성공해 인천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인부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시대, 광복과 6·25전쟁, 그리고 폐허 위에서의 건설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정주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자랐다. 미포조선소를 세우고, 주베일 항만공사를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역량은 신화적인 데가 있다. 허허벌판을 찍은 사진 한 장만으로 외국 선박회사를 찾아가 조선 수주를 받아내고, 조선소와 배를 한꺼번에 지어 가는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력, 무슨 일에나 ‘안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추진력은 숱한 ‘마이너스 유산’도 남겼다. 첫째, 정경유착이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정권 때 초기 실력자들은 건설업자 정주영으로부터 ‘집 한 채 지어드릴까요’라는 제의를 받곤 했다. 나중에 박정희에 대한 정주영의 정치 자금 ‘베팅’이 너무 커져서 그것을 알게 된 실력자 김모씨는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각하, 정치자금은 국세청장 고00를 통해서 얻어 쓰시고 정주영한테 직접 받지 마십시오”라고. 5공 6공 시절 정치자금을 바친 얘기는 그 자신이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대로다.

둘째, 오늘날 비판의 적이 되고 있는 황제경영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왕회장’인 그의 주장과 결정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그런 무소불위의 힘을 과신하게 된 왕회장은 92년 대통령이 돼보겠다고 나섰다. “내 돈 내가 벌어서 내가 쓴다는 데 무슨 소리냐”고 외치고 나선 그의 대선 출마와 패배는 한국 재벌의 병든 의사결정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셋째,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자세는 때와 장소에 따라 말과 소신을 바꾸는 패턴으로 이어졌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 “한국은행이 3000억원을 찍어 여당 선거자금으로 썼다” “새한국당과 당대 당 통합을 한다”고 말했다가 선거가 끝나자 “실수였다”는 한마디로 털어버렸다. 정치발전기금 2000억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가도 “선거에도 떨어지고 법으로도 안된다니”라며 물러섰다. 양식과 도덕성을 생각케 하는 사례다.

넷째, 독단적인 지배구조, 가족경영으로 초래한 위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현대 위기는 전횡적이고 가족적인 지배구조가 바로 자본시장의 신뢰를 잃어 위기가 온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내외의 신용이 흔들리는 가운데 아들들끼리의 ‘왕자의 난’이 되풀이됨으로써 끝내는 현대그룹의 뿌리가 동요하고 한국경제까지 위태롭게 된 형국이다.

정주영씨의 3부자 퇴진 발표는 ‘몽구씨의 저항’ 문제를 남기고는 있지만 그런 대로 자본시장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요행으로 현대사태가 진정 되더라도 왕회장이 남긴 마이너스의 유산, 즉 정경유착, 황제경영, 도덕성, 그리고 가족지배의 문제는 지나쳐 버릴 사안이 아니다. 크건 작건 모든 재벌의 문제이고, 한국 경제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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