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월드]'디아블로'/ 공포와 싸우는 저주받은 게임

  • 입력 2000년 5월 28일 21시 33분


버려진 예배당의 지하로 끝을 알 수 없는 던전이 입을 벌린다. 그 흐릿한 어둠 속에 홀로 삼켜진 채 지옥의 밑바닥에 잠든 비밀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던 세계의 존재는 고대의 전설처럼 아스라해지기만 한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인 RPG '디아블로'는 이렇듯 게임이 창조해낸 환상 속으로 게이머를 완벽하게 끌어들인다. 이 저주받은 게임에 손을 댔던 사람이라면 자정을 넘긴 새벽, 손에 쥔 마우스가 땀에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모니터에서 두 눈을 뗄 수 없었던 해괴한 경험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상태가 되면 수면의 달콤한 유혹은 이미 그 매력을 잃고, 내일 아침의 전공 시험도 먼 나라의 이야기다.

이러한 몰입의 기저에는 어둠과 미지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이 흐르고 있다. 게이머의 시야는 시종일관 불투명한 어둠에 의해 제한되며, 그 어둠 속에서 갑자기 달려드는 미지의 괴물들은 순식간에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간다. 실시간 진행인 게임 방식 역시 일단 고개를 든 공포심을 제어하는 데 절대적으로 비협조적이다. 갑자기 맞닥뜨린 정체불명의 적으로부터 도망치며 정신 없이 치솟는 심장의 박동을 느낄 때, 이미 게이머는 모니터 앞이 아닌 캐릭터의 갑옷 안에 있다.

그러나 이렇듯 완벽한 동화는 결국 고독으로 수렴한다. '디아블로'의 고독은 게임의 도입부이자 유일한 안식처인 마을에서부터 게이머를 휘감아들기 시작해, 게임의 끝까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대여섯에 불과한 NPC들과 우중충한 배색, 그리고 제한된 대화와 단조롭다 못해 구슬픈 음악... 그 어디에도 게이머가 같이 어울릴만한 동료는 없다. 하다 못해 게임 중간에 몬스터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반갑기까지 할 정도이니, 그 고독의 수위는 보통을 한참 넘어서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디아블로'의 고독은 좀처럼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게이머의 어깨 위에 슬쩍 올라앉아 있다가 서서히 그 몸집을 불려가며 짓눌러대는, 그런 종류의 고독인 것이다. 게이머가 자신을 옥죄던 중압감의 근원이 마지막 전투까지 철저하게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고독임을 깨달을 즈음, 게임의 엔딩은 홀로 쓸쓸히 떠나는 주인공의 뒷모습에 그 자각을 영원히 못박아 버린다. 한편 게임에 몰입해 있는 동안 만큼은 게임 밖의 현실에서도 지극히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게이머 뒷모습에 정보화 사회의 메갈로폴리스가 제공하는 소외감을 투영해 보고 싶은 것은 필자만의 욕심일까?

게임은 게이머의 감성을 자극하고, 게이머는 그러한 자극에서 게임을 진행할 추진력을 얻는다. 그 추진력의 본질이 단순한 파괴본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디아블로'는 한번쯤 권해볼 만한 게임이다. 왜냐하면 '디아블로'가 자극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단순한 파괴본능보다 한 꺼풀 더 깊은 곳에 내재된 인간의 감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디아블로'가 성공적인 게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또한 '고전'의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민영(판타지 소설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작가·서울대병원 전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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