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표현인문학' '한국의 정체성' 外

  • 입력 2000년 5월 26일 20시 08분


“인문학은 위기인가, 정말 그러한가? 그러면 인문학은 무엇인가? 인문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 학계에 상당한 ‘인문학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학자 여덟 명이 인문학에 대해 너무나도 기본적인,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포항공대 박이문 명예교수(철학), 연세대 유종호 석좌교수(국문학), 숙명여대 김주연교수(불문학), 이화여대 김치수(불문학) 정대현(철학), 이규성(철학), 정덕애(영문학), 최성만교수(독문학). 이들이 모여 5년간이나 인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니 일단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인문학을 알기 위해선 먼저 인간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을 탐구했고 나아가 진리와 의식과 이성, 그리고 각종 이론을 살피고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비교 탐색하며 기존 인문학의 문제를 파헤쳤다.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표현인문학’.

그들은 “전통적 인문학이 고전 읽기의 이해를 통해 자유의 확장을 추구했다면, 이 시대의 인문학은 일차적으로 문자, 그리고 이차적으로 비문자를 포함한 문화활동을 통해 사람다움의 표현을 모색하는 노력”이라고 규정하며 “모든 사람은 자기 성취를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기 표현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인문학의 근본적인 방향설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생산적 토론과 지적 양식의 터전을 넓히기 위한 또 다른 의미있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책세상’출판사가 문고판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타이틀로 올해 안에 1차분 100권, 나아가 300권 또는 500권 이상의 인문 사회과학 서적을 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현실상황과 무관하게 지적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지식세계의 담을 무너뜨려 전체 대중의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겠다는 것이다. 필자들은 우리 사회의 현안을 진지하면서도 대중적으로 논할 수 있는 ‘박사급’ 이상의 전공자. 번듯한 직함은 중요치 않다.

“자랑스런 한국인인 만득이가 아프리카의 한 소국을 방문했다. 도착하고 보니 공항의 건물이 모두 한옥 양식이다. 이 나라는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는데 왜 자신들의 고유한 건축 양식을 포기했을까? 택시를 타니택시기사는 한국어를 구사하려 애쓴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거리 곳곳에는 한정식이란 간판을 단 고급 식당이 눈에 띈다.…과연 이 나라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만득이는 의심한다.”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위해 정체성의 개념 해석이나 이론적 논란은 중요치 않다. 필자는 미국문화의 범람 속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음직한 정체성의 문제를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하기 위해 ‘만득이의 혼란’을 설정한다. 필자들은 원론적인 고민을 더 이상 계속하기보다는, 비록 거친 문체일지라도 직접 ‘표현과 토론의 대안’을 찾아 나선다.

‘한국의 정체성’을 비롯해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전재호) ‘악기로 본 삼국시대 음악 문화’(한흥섭)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권명아), 그리고 며칠 후 나올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박동진)까지 이달 안에 5권이 발간된다. 이들의 ‘대장정’은 이제는 소멸하다시피한 ‘문고판’의 부활과 ‘간판’에 연연하지 않는 필자 선정의 측면에서 특히 기대를 모으게 한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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