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판사 1명이 12개社 법정관리 '허덕'

  • 입력 2000년 5월 22일 19시 41분


21일 검찰이 발표한 법정관리(회사정리, 화의, 파산) 기업 비리는 부도가 나 침몰하는 기업을 둘러싼 부도덕한 임직원들의 난맥상을 여실히 반영했다.

나산과 광명전기 진덕산업(회사정리) 동신(화의) 기산(파산) 등 5개업체에서 적발된 11명의 신분은 법정관리인 3명, 파산관리인 1명, 중견간부 6명, 브로커 1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회사정리법을 위반해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회사돈을 횡령해 개인 용도로 사용하거나 계약 등과 관련해 납품업체 등에서 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법정관리는 법원이 관리인을 선임하고 엄격하게 통제하도록 돼 있다. 법원은 관리기업의 경영주 역할을 하는 셈. 이에 따라 잇따르는 법정관리 기업의 비리로 비난의 화살이 당장은 법원에 모이고 있다.

▼법정관리 실태▼

법정관리 기업의 관리인은 회사의 경영주체이자 법원의 대리인이다. 회사의 규모마다 다르지만 관리인은 1000만∼5000만원 이상의 자금지출이나 계약체결 인사 등 대부분의 경영 사안을 법원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법정관리 기업이 급증했던 반면 이를 관리할 법원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현재 서울지법 파산전담 재판부의 경우 양승태(梁承泰)수석부장판사를 포함한 6명의 판사가 72개 기업의 회사정리 절차를 밟고 있다.

수원과 인천 등 나머지 12개 지방법원은 서울처럼 전담재판부도 없이 법원장 아래 수석재판부 판사 3명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이들 법원의 99년말 미제사건은 회사정리 사건만 모두 110건.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최근 새로운 사건이 다소 줄었지만 이미 관리 중인 기업이 많아 직접 기업 현장에 나가 장부나 영수증을 확인하는 일 등은 어렵다”고 말했다.

▼법원의 입장▼

법정관리 기업의 비리에 대해 법원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입장이다. 관리인 3명의 비자금 조성사실은 비록 잘못된 것이지만 이들의 행위는 ‘회사를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

실제로 검찰 수사결과 서울지법 관할인 나산의 경우 관리인 백모씨(54)가 1억30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했지만 모두 신규 직원 스카우트 비용에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진덕산업의 관리인 이모씨(58)는 3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공사 현장 업무추진비 등에 사용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관리인 3명이 돈을 개인 용도가 아닌 회사를 위해 사용한 점을 참작해 고심 끝에 벌금형에 약식기소하는 데 그쳤다.

법원 관계자들은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관리인들이 어쩔 수 없이 비자금을 조성한 경우보다도 구 사주와 과거 하청업체, 직원들이 벌이는 ‘회사 흔들기’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양수석부장판사는 “구 사주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법원의 지휘를 받는 관리인을 축출하고 자신의 사람을 중요 자리에 세우려 한다”며 “과거 회사와 리베이트를 주고받으며 거래를 해 온 하청업체도, 일부 해당회사 직원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이번 검찰 수사도 이같은 복잡한 내부 알력과정 때문에 불거져 나온 고소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법원 검찰의 설명.

▼대책과 과제▼

법원의 인력부족과 당사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실에서 ‘기업 회생’이라는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정 관리를 통한 투명경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서울지법의 경우 4월부터 모든 정리회사가 외부 감사인의 회계 감사를 받도록 지시하고 부실회계감사에 대해서는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각서까지 받은 상태.

또 관리인을 상대로 분기마다 정밀한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고 경영상황에 대해 관리인을 평가하고 있다. 서울지법은 10일 서울 리베라호텔에 모든 법정관리기업 관리인을 모아놓고 “기업과 관리인이 살 길은 투명경영”이라고 ‘정신교육’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투명경영’에 대한 강조도 필요하지만 법원이 관리인과 임직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파산 관련 재판부의 증설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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