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박태준씨의 '뇌물'

  • 입력 2000년 5월 21일 19시 44분


박태준(朴泰俊)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박총리가 그동안 경제 개혁에 힘쓴 것 등을 들어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박총리 자신은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이 일자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물러난 뒤 여권의 대체적인 반응은 ‘안타깝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공동여당인 자민련이 등을 돌린 뒤에도 정부에 남아 협력했던 박전총리에게 ‘정치적 인사’를 했을 수 있다. 박전총리 자신이나 여권은 ‘주변관리를 잘못해 엉뚱하게 불거진 사건’으로 총리 자리를 물러나고 정권에 부담이 된 것이 안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박전총리의 개인적 ‘불운’이나 여권의 ‘안타까움’ 정도로 넘어가도 되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이번에 드러난 부동산 명의신탁건이야 당시 이를 규제하는 법이 없었기에 법적 하자는 없다고 치자. 그러나 박씨가 재산증식에 사용했다는 ‘뇌물’ 부문은 어떻게 봐야 하나.

93년 2월 국세청은 박씨가 포항제철회장이란 직위를 이용해 협력업체들로부터 56억원을 받았다고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이 돈 중 39억700만원을 대가성 있는 뇌물로 보고 94년 10월 박씨를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95년 8월 당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공소취소결정이 내려지면서 박씨는 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추징금을 한 푼도 물지 않았다.

물론 검찰의 공소취소로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상 박씨의 혐의를 유죄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당시 뇌물을 건넨 기업인들이 거의 유죄가 인정된 데 비추어 박씨에 대한 정상적인 재판이 진행됐다면 검찰이 뇌물로 기소한 39억여원 중 상당액을 추징당했을 개연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공소취소로 일단락된 사건을 다시 재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씨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오늘에 이르렀다’는 말과는 달리 뇌물성 돈으로 여러 군데에 부동산을 사뒀는가 하면 친인척과 주위사람 이름으로 돈세탁을 하고 명의신탁으로 탈세를 꾀하는 등 불법 비리를 저질러온 것이 드러났다.

또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과 신고한 재산의 차이도 상당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박씨가 법적인 문제를 떠나 도덕적인 책임을 절감한다면 스스로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게 사리에 맞는다고 본다. 그럴 때 만년(晩年)의 불명예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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