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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5월 18일 19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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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자원을 배분할 때 이를 우선적으로 부여받는 줄서기 게임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불법적으로 조성된 비자금과 은밀한 거래이며, 이에는 소수 가족구성원에 의해 지배되는 경영체제가 경쟁우위를 갖는다. 물론 이러한 은밀한 거래가 통할 수 있는 배경에는 원칙보다는 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재벌체제로 대표되는 대규모 기업집단의 강점은 매우 다양하다. 다각화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통해 규모와 범위의 경제성을 달성하고 경영위험을 분산하며,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정부 정책 하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한 신용과 담보능력을 통해 자금조달이 용이해진다. 외부로부터의 자금조달이 어려운 경우에도 상호지원 등을 통해 계열사들은 지속적 투자를 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으며 계열기업 생산품의 안정적 수요자가 되기도 한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종합기획실 비서실 등도 선진국에서 관찰되는 지주회사의 역할을 대행하여 전략적 의사결정 기능이 강화된다.
하지만 장점과 동시에 단점도 많다. 무분별한 다각화로 사업의 전문화를 이루기 어렵고, 부실 계열기업의 퇴출이 지연될 경우 그룹전체의 도산을 가져오기도 한다. 계열사간 상호지원은 불공정 경쟁의 원인이 되어 경쟁기업의 성장을 제한하고 궁극적으로 국가경제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무엇보다도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2세 경영자의 무분별한 경영권 세습은 기업에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하며, 불투명한 경영체제에 의해 지배되는 거대기업집단이 부실화할 경우 한 국가경제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한다.
향후 한국경제에서 재벌체제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작금에 관찰되고 있는 경제 및 경영환경의 변화는 분명히 재벌체제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우 등과 같은 상위재벌의 퇴출로 대마불사의 신화도 사라지고 있어 무작정 몸집만 키우는 기업확장 전략은 유효성을 잃고 있다. 계열기업간 상호지원 등 불공정거래에 대한 감독당국의 조사기능 강화도 기업집단을 형성할 중대한 유인을 제거한다. 대외개방과 국제화, 벤처기업의 등장 등 상품시장에서의 경쟁격화, 부(富)의 불법적 대물림을 제한할 상속세제의 개편, 소액주주권 강화와 경영투명성 제고 등도 가족중심의 소유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재벌체제를 유지케 하는 요인들도 상존하고 있다. 향후에도 공정거래정책, 산업정책, 세제정책, 여신정책 등 재벌관련 정책은 정치권의 움직임에 따라 수정될 것이다. 정부와 재벌의 금융기관 지배는 금융자원의 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공기업 민영화 등 주요사업기회의 배분이 불투명하게 이루어지는 한 재벌체제의 우위성은 유지될 것이다.
지난 2년간의 구조조정 성과에 대한 논쟁과 함께 제2의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에는 기업소유지배 구조가 자리잡고 있으나 향후의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다. 선진국의 경우 기업규모가 커지면서 창업자 대주주는 사라지고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지배하는 전문경영자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있다. 주식도 별로 소유하지 않은 이들 전문경영자가 다수주주를 위해 (주가를 극대화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배경에는 적절한 견제장치와 스톡옵션 등 인센티브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전문경영인들은 여전히 소수 대주주를 위해 일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이들의 빵과 자리가 이들 대주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들이 기업의 주가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할 경우 계열사간 부당지원과 경영세습을 위한 상속행위도 사라질 것이며 기업집단 체제도 약화될 것이다. 기업의 지배구조개선이야말로 재벌문제의 핵심인데 이제까지 우리는 다른 것만 건드려 왔다. 물론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는 문화의 영역에 속해 하루아침에 고쳐질 사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를 초조하게 한다.
박경서(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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