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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3월 15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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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직업란에 작가라고 쓰는 것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직업작가가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 시대에 비해 특별히 문학시장이 넓어졌다거나 발표 지면이 늘어났다거나 원고료가 비약적으로 오른 것도 아니다. 아니, 좋아지기는커녕 직업작가를 둘러싼 사회, 경제적 환경은 오히려 불리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지면의 경우, 한마디로 턱없이 줄었다.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만한 원고료가 나오는 신문연재만 해도 한때는 한 신문에 2개, 혹은 3개씩의 장편이 연재됐는데 지금은 연재소설 자체가 없어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 신문뿐인가. 각종 여성지 주간지를 비롯한 상업적 매체에 반드시 실렸던 소설이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비교적 원고료가 후했던 각종 사보에서조차 작가들의 효용성이 폐기처분된 지 오래됐다. 요즘 작가들이 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은 몇몇 문예지나 동인지 형식의 단행본이 전부이다. 외형상 문예지 숫자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그나마 적자를 감수하며 턱없이 적은 원고료를 지급해주는 문예지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동인지 형식의 무크지나 단행본은 작가 스스로 돈을 내어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문학도 출판시장도 불탄 북어 껍질처럼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인세수입은 고사하고 자비출판되는 작품들이 훨씬 많다.
또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그나마 발행부수는 놀랄 정도로 적은 숫자이다. 국내문학도서만 집계할 때, 1만권도 못 팔린 책이 베스트셀러 10위권 안에 드는 경우도 나는 많이 보았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어떻게 살까.
어쩌다 받는 원고료 수준은 참담해서 아예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떤 문학단체에서 조사한 작가들의 평균수입이 한 달에 20만원도 채 안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물론 그렇다. 작가들은 장인이 되고자 한다. 장인은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리운 곳을 향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아내와 자식의 안락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 진정성이 사라지면 끝장나는 것이 장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작가들이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오로지 작가의 이름으로만 살고자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작가들과 그의 가족들은 수목 같아서 이슬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존재들인가, 하는 이런 소문도 있다.
작가들도 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박한 언론 매체들은 작가들의 수입순위를 매겨보기도 하고 판매 랭킹을 발표하기도 한다. 아주 극소수의 작가들이 그나마 누리는 중산층 수준의 경제적 혜택을 침소봉대하여 일반화함으로써 터무니없는 소문의 진원지가 된다.
경제적 논리만으로 보면 벼농사를 모조리 청산하고 캘리포니아산 쌀을 사먹는 게 훨씬 낫다. 그러나 과연 논을 메워 공장을 짓는다면 잘 먹고 잘 살게 될까. 문학은 말하자면 문화예술의 전 장르를 놓고 볼 때 1차산업과 같다. 문장은 어떤 경우에도 사유의 세계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벼농사엔 우리 문화의 총체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만약 논을 모조리 메워버린다면 그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생태계의 변화를 우리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국가예산의 1%가 마침내 넘어섰다는 문화예산에서 내가 아는 바, 문화예술 분야의 벼농사인 문학에 작년 투자한 것은, 가난한 작가 시인들에게 상상력 없는 우직한 방법으로 생계비를 보조한 20억원이 거의 전부이다.
21세기는 문화 마케팅이 중요하다면서, 인기가수 등과 화사한 포즈로 접견하고 있는 문화관광부장관님의 얼마 전 모습이 지금 눈앞에 어른거린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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