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 하이더가 꿈꾸는 ‘극우 유토피아’

  • 입력 2000년 2월 8일 20시 19분


국토는 한반도의 3분의 1을 겨우 넘고 인구는 820만 명에 불과한 오스트리아의 ‘정권교체’ 때문에 유럽 대륙 전체가 시끄럽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연합 14개 회원국가들이 모든 정치적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경고하자 미국과 이스라엘도 이것을 거들고 나섰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서유럽에서 벌어진 이 희귀한 정치적 풍파는 외르크 하이더라는 인물에서 비롯되었다.

강력한 우익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하이더는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지도자로서 지난해 봄 지방선거에 이어 10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최대정당 사민당은 65석으로 선두를 지켰지만 단독정부 수립에 필요한 과반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했다. 하이더의 자유당은 52석을 차지했다. 사민당은 그 동안 연정 파트너였던 인민당과의 진보-보수 대연정을 연장하기를 원했지만 제3당인 보수 인민당은 이것을 거부하고 하이더의 자유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해 버렸고 클레스틸 대통령은 이를 마지못해 승인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국내 정치문제에 어째서 유럽연합과 미국이 간섭을 하는 것일까. 언뜻 보면 부당한 내정간섭이라는 하이더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문제는 하이더의 거침없는 극우적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몇 가지 사례만을 보자.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폭력을 선동하는 신문에 돈을 주고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를 위해 돈을 쓴다. 그래서 품위 있는 인간에게 쓸 돈이 없다.”(95년 9월 나치 친위대 퇴역장교 모임 연설)

“흑인들은 정말 문제가 많다. 그들이 다수파를 형성한 곳에서조차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95년 1월 신문 인터뷰)

“과거에 대한 끝없는 사죄행각은 결국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벌써 수십 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언제까지 떠들어댈 거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뿐이다.”(올 2월 신문 인터뷰)

유대인 학살 등 나치의 전쟁범죄에 ‘자의 반 타의 반’ 협력한 전죄(前罪)가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하이더는 이런 소리를 ‘용감하게’ 뱉어냄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그런 그가 이끄는 정당이 정권을 잡았으니 이웃 나라들이 못마땅해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이더가 입만 열면 막말을 해대는 극우 돈키호테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그는 빼어난 ‘우익적 수사(修辭)’를 구사하는 선동가다. 15개 유럽연합 회원국의 ‘정상적인’ 좌파와 ‘정상적인’ 우파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우리는 지난 시대 경제성장과 유복한 생활 가운데서 잃어 버렸던 가치와 미덕을 확실하게 회생시킬 필요가 있다. 근면 성취의욕 노동윤리 규율 질서와 같은 가치와 분수를 지키는 자세, 협동정신, 절약정신과 예의범절 같은 미덕이 그것이다.”(94년 9월 신문 기고)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 같지 않은가? 기억력이 웬만한 독자라면 초등학생 시절 외우기를 강요당했던 국민교육헌장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더의 이 말 자체는 듣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있고 역겨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의 폭력을 경험한 유럽인들은 히틀러의 연설을 복사한 ‘극우적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독일의 극우정당인 공화당이나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극우 국민전선, 이탈리아의 신파시스트당 지도자들도 즐겨 쓰는 표현으로, 정치 지도자가 설정한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주어진 역할에 받아들이고 정해진 규율에 복종하는 ‘극우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유럽의 민주세력이 오스트리아의 ‘정권교체’에 시비를 거는 것은 ‘정상적인’ 우파 인민당이 ‘극우’ 자유당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우파 정당들이 똑같은 일을 벌일 경우 유럽의 정치지형이 50년 전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한국 사회, 이대로 좋은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겠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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