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36)

  • 입력 2000년 1월 28일 18시 25분


서리가 뽀얗게 내린 대평원에 해가 뜨는 장면은 이 엄청난 대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게 했습니다. 쉬임 없이 달리는 기차 때문에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낮게 뜬 해가 가리워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어요. 끝없는 벌판 군데군데에는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지붕과 나무판자 울타리가 보였고 그것은 대지 위에 생겨난 작은 흠집처럼 보였지요.

노란색 갈색 짙은갈색으로 얼룩진 자작나무 잎사귀는 햇빛을 받아 황금 조각처럼 나부꼈고 잎갈나무도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는데 초원과 습지 너머로 전나무 가문비나무 소나무의 늘푸른 숲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이런 숲은 하루종일 달려도 끝나지 않는 대평원의 저 아득한 지평선에까지 닿아 있었구요. 처음 하루 이틀은 이 압도적인 땅을 내다보느라고 둘 다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었어요.

아침에 해가 떠서 강물과 습지의 웅덩이 위에서 은 그물 같은 빛을 반짝거리게 하거나 오리며 새떼들이 하얗게 갈대 숲 위로 날아오르는 걸 보았어요. 풀 사이로 검게 드러난 비옥한 러시아 평원의 흑토 밭고랑들이 철길 곁을 따라서 흘러갔어요. 아직 베어지지 않고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가에는 사람은 없고 녹슨 트랙터 한 대가 서있지요. 정지하지 않고 지나쳐버리는 광야 한가운데의 작은 간이역은 낡은 회색 빛깔로 퇴색된 목조가옥인데 검은 제복에 붉은 줄을 친 모자를 쓴 역무원이 깃발을 들고 서있었어요. 체격이 좋은 선로지기들이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줄지어 침목을 메고 뒤뚱대며 걸어가기도 하구요.

객차의 양쪽 끝에 있는 일등 화장실에 가서 세면도 하고 더운 물을 틀어놓고 대충 몸을 씻기도 했어요. 그러고 나면 아침을 먹는데 햄과 라이 빵에 열차 판매원이 밀차에 끌고 다니는 수레에서 뜨겁게 데운 우유 한 잔을 사먹어요. 그리고 점심은 식당차에 가서 하루 중에 한번 뿐인 정찬을 먹지요. 당근과 감자와 양배추를 듬뿍 넣어 마요네즈 같은 샤워 크림을 쳐 주는 보르시치 수프에다 딱딱하고 신 라이보리 빵을 먹고 나서 파스타와 고기와 완두콩을 넣은 스튜를 먹었어요. 우리는 이걸 먹으면서 자장면이라고 킬킬거렸는데 아주 괜찮았지요. 맥주는 모스크바 상표를 붙이고 있었는데 달치근한 맛과 발효한 냄새가 너무 생생해서 우리는 또 이걸 막걸리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어쩌다가 기차가 갈림길에서 쉬게 되면 시골 역에 나가서 철로변에 기다리고 있는 행상 아줌마들을 찾아갔지요. 따뜻한 객실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 갑자기 쌩하니 추운 바람이 등을 때리는 것 같았어요. 햇빛은 투명하고 하늘은 새파란데 마치 우리네 초겨울 날씨 같았죠. 아줌마들은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조끼나 쉐타를 입고 제각기 떠들며 우리를 불렀어요. 그들이 가지고 나온 것은 집에서 구워 온 빵이나 과자들, 찐 계란, 그리고 아직도 냄비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 감자, 튀김, 볶은 해바라기 씨, 작고 못생긴 사과와 쪽파 등속들이죠. 영태와 나는 간식으로 뜨거운 찐 감자를 샀어요. 신문지에 싸주는데 쪽파도 한 묶음 같이 주어요. 우리는 나중에야 감자를 먹으면서 쪽파를 소스에 찍어 먹는다는 걸 알았죠. 우리 칸의 승무원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토냐라고 하는 통통한 아가씨였는데 우리와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곤 했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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