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23)

  • 입력 2000년 1월 13일 19시 11분


전철을 타고 철로의 이쪽 편은 서베를린이고 건너편은 동베를린인 프리드리히 스트라세 역까지 가서 처음에는 그 애를 통관하는 게이트가 있는 지하 폼으로 내려보내고 우리는 돌아올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영수가 애원하듯이 말했어요.

저하구 같이 가주십쇼. 전화를 하면 데리러 나올 겁네다.

그래 같이 가지.

이 선생이 영수의 등에 팔을 두르며 지하로 먼저 내려가는 바람에 나도 그들 뒤를 따랐어요. 줄지어 늘어선 관광객이며 시민들 틈에 끼어 역 구내를 통과해서 차도를 건너가 포츠담 광장으로 갔어요. 광장의 가운데는 잔디밭이었지만 관리를 안해서인지 군데군데 벗겨저 흙이 드러난 곳이 많았어요. 벤치가 광장 둘레에 놓여 있었고 공중전화 부스도 있었죠. 부근의 벤치 앞에서 이 선생이 영수에게 말했습니다.

전화 해봐라.

부스 안에 들어가서 한동안 통화를 하고 나온 그 애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지요.

곧 온답네다.

포츠담 광장은 행인이 별로 없이 한적했는데 건너편에는 국영 호텔이 보였고 그 너머로 중심가의 차도가 보였어요. 우리는 정면으로 그쪽을 향하고 있는 벤치에 앉아서 삼십 분이 넘도록 기다렸어요. 차 한 대가 광장 모퉁이로 들어서는 게 보이고 거기서 두 사람이 내렸습니다. 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났지요. 그가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서있더니 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이 똑바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왔어요. 그들이 가까이 오자 이 선생도 벤치에서 일어났지요. 영수가 말했어요.

저 가겠시오. 두 분 안녕히 계시라요.

잘 가라, 열심히 공부하구.

잘 가요.

영수는 마중 나온 두 사람과 함께 광장을 건너가면서 몇 번 우리를 돌아보았고 이 선생과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프리드리히 스트라세 역에서 전철을 타고 갔던 길을 되돌아 왔어요. 그의 집에 가서야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더군요. 내가 그에게 말했어요.

역시 돌려보내길 잘했어요.

내가 살 곳이 생각났어. 백 오십오 마일 경계선이 마주 달리는 그 안쪽에 생태계의 낙원이 있다잖아.

비무장지대 말이죠?

거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청춘 남녀들이 몰려 들어가서 국제적인 평화공동체를 만드는 거야. 그러노라면 경계선이 무너질까.

그 뒤로 동유럽은 급속도로 변해 갔어요. 아프리카나 남미의 비동맹권은 더했지요. 헝가리에서 사회당이 폴란드에서는 연대회의가 체코에서는 시민포럼이 정권을 잡았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 알바니아 크로아티아가 뒤를 이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에서 시작했던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이른바 국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행되어 갈 수 밖에 없었지요. 천 구백 팔십구 년을 기점으로 세계사의 반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당신이 꿈꾸었고 내가 마음 깊이 찬동했던 우리들의 소망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출발점으로 되돌아 온거예요. 현재의 삶의 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쨌든 이 변화된 세계 속에서 수많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다시 실천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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