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성남/'민주화 희생' 기려야

  • 입력 2000년 1월 10일 19시 48분


국회는 20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회기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를 두고 어떤 언론은 ‘역사의 변방에 몰렸던 민주화 희생자들을 제 위치에 놓기 위한 소중한 작업이 시작됐다’고 표현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회장 배은심)는 두 법안의 국회 통과를 보고 98년 11월이래 442일간의 기나긴 국회의사당 앞 천막 농성을 매듭지었다. 천막 농성을 풀면서 고 이한열군의 어머니이자 유가협 회장인 배은심여사는 “혈육들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시작한 기나긴 투쟁이 법안 통과라는 성과를 거둬 천막을 철거하고 농성을 정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 해단식을 가졌던 60,70대의 유가협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돼버린 혈육들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440여 일간의 기나긴 농성을 버텼던 것은 아닐 것이다.

초로를 넘은 유가협 회원들의 억울하고 의문스러운 혈육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과 그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투쟁은 86년 유가협 창립 때부터 시작됐다. 이 싸움은 관료 조직의 저항과 세간의 무관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됐다. 이들의 요구는 혈육들에 대한 사랑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독재와 싸운 죽음의 정당성에 대한 확인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루는 초석이 된다는 정치적 확신과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윤리적 전제는 국가 구성원인 개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인정하고 고양시키는 것이다. 반대자의 생명을 생명처럼 여기지 않은 억압에 저항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주의의 선언이며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를 통해 비로소 그같은 민주화의 열망을 제도화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집권당의 노력과 대통령의 법안 통과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오랫동안 천막 농성이 계속돼야 했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우리를 정말로 슬프게 한다. 정부 일각의 반대, 국회 일각 특히 야당의 소극적 태도, 언론의 무관심 등은 과거의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됐던 비민주적 권위주의 체제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얼마나 사이비 상황에 순치되도록 훈련시켜 왔는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전율을 느끼게 한다.

모두들 권력을 뒤쫓거나 돈벌이를 하느라 바빠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이나 정치적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눈감아 버리거나 모른 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 발전이란 공공이익의 영역과 비례하기 마련이니 유가협의 민주적 열망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21세기는 과연 어떤 모양새를 띠게 될지 자못 두렵기조차 하다.

88년 10월 5공화국 이후의 군대내 의문사진상규명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돼 피해자 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같은 해 11월 당시의 평민당은 5공통치 기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사망원인이 규명 안된 30여명의 명단을 공표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 진상을 규명하려고 나선 일이 있었는지, 어느 보도 매체가 의문이라도 제기한 일이 있는지, 아니면 우리중 누가 일말의 관심이라도 표명한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볼 때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젊은이들의 대단히 의심스러운 자살이 이어졌던 과거를 어느덧 잊어버리고도 새로운 세기를 그럴듯하게 그리고 있는 정치,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일 것이다.

민주화운동 관련 2개 법률이 시행되기에 이르렀지만 반민주적인 망각과 무관심, 관료적 은폐 노력이 몇 사람 안되는 노인들에게 또 다른 좌절로 절망에 이르지 않게 되길 바라고 싶다. 그 가족들의 열망은 우리의 민주적 성숙을 재촉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김성남〈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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