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기숙/'공천헌금' 뿌리 뽑으려면

  • 입력 2000년 1월 7일 00시 48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신년 인터뷰에서 전국구 공천과 관련해 돈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동안 과거 야당들은 관례적으로 전국구 공천헌금을 받아 지역구 출마 후보의 선거자금을 조달했다.

이 때문에 비례대표 의석은 전(錢)국구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기도 했다. 이총재의 이러한 선언은 정치불신이 극에 달해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국민에게 똑 쏘는 청량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국민회의는 “깨끗한 정치의 구현을 위한 획기적인 발상”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인기성 발언이라는 냉소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솔직히 말해 이로 인해 한나라당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냐는 질시의 감정도 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발언이 분란을 일으킨 곳은 한나라당 내부다. 가뜩이나 돈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로 인해 총선전략이 차질을 빚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중앙당 후원회 모금액은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의 비율이 188대 1로 엄청난 격차를 보였는데 이는 과거에도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김대중대통령은 틈만 나면 이번 총선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가 유례없는 금권 혼탁선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겪게 될 고통을 말 안해도 짐작할 만하다. 이에 한나라당의 하순봉 사무총장은 “요구는 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특별당비를 내는 것을 받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하여 당내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자 했다.

깨끗한 정치를 갈망하는 국민의 입장에서 이총재의 발언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크다. 그러나 두 가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로 이총재 자신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지만 사무총장 등이 특별당비 모금 등을 ‘대행’할 가능성을 들 수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도 당선 직후 “임기 중에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아들인 김현철씨의 각종 이권개입으로 국민을 분노케 하였다. 지난 대선에서도 이총재 자신은 자금조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측근이 국세청을 동원해서 선거자금을 거뒀다는 일명 ‘세풍’의 의혹을 받기도 했다. 아들의 병역기피 사실을 몰랐다는 이총재의 고백을 믿는 국민도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이총재 본인은 직접 개입하지 않았을지라도 만일 측근에 의한 특별당비 징수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이총재의 도덕성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지도자는 아랫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신선한 약속이 청량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국민의 갈증을 오히려 더 심하게 만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는 한나라당이 결정적으로 돈 때문에 총선에서 패하게 된다면 앞으로 누가 감히 정치개혁에 앞장서려고 하겠는가 하는 우려다. 선거를 치러본 사람이라면 이 가능성이 한낱 기우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결국 이총재의 발언은 한때의 치기로 폄훼되고 말 것이다.

이런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정당이 전국구 공천헌금을 받지 않고도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여야의 정치자금이 왜 이토록 심한 불균등 상태를 보이는지에 대해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야당에 후원금을 주고 싶으면 마음대로 주라”는 발언이 대통령에게서 나오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자체가 문제다.

여당은 말로만 인심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제도개선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 3억원 이상의 법인세를 내는 법인의 법인세액 1%를 정치자금으로 의무기탁받아 야당에도 의석 비율에 따라 의무기탁이 돌아가도록 하는 선관위의 정치자금 제도개선안이 정치권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해본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국제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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