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1)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4시 58분


나는 가끔 카데베 백화점에서 돌아올 때라든가 비나 눈이 오는 날에 타던 택시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어요. 광장 건너편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고 바로 앞에 택시 정류장이 있는데 보통 때에는 늘 두 세 대의 택시가 늦은 밤까지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내가 정류장으로 건너가면서 마리를 재촉했어요.

우리 택시 타요.

베를린에서는 길가에서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잡을 수가 없어요. 거리의 블록마다 정류장이 정해져 있고 거기 서있으면 지나가던 빈 택시가 다가와서 태우는 식이지요. 잠깐 기다리는 중에도 택시가 보이질 않아서 나는 아마 초조했던가 봐요. 발을 조금씩 동동거리며 우왕좌왕 했거든요. 마리가 말했어요.

택시가 곧 올텐데 유니 왜 서두르는 거야?

우리가 가기 전에 다 끝나버릴지두 모르잖아요.

마리는 웃었어요.

끝나다니 이제 시작이야. 나는 느낄 수 있어. 전쟁에 지고 동서로 쏘련군과 미군이 들어올 때엔 이번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때에는 나는 어머니와 동생하구 무너진 지하실 벽 사이에 숨어 있었어.

베를린 사람들은 이렇게 될줄 알고 있었어요?

지난 여름에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쪽으로 넘어 오겠다며 망명 신청을 했고 헝가리를 경유한 망명자 집단이 서독으로 왔지. 가을엔 라이프치히에서 여행 자유화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고 지난 주에는 동베를린에서 백만 명이 시위를 했어. 그렇지만 본에서는 수백만이 반핵 시위를 하고 서베를린에서는 날마다 시위를 해도 아무 일도 없잖아.

그래요, 동베를린의 시민들 일은 나두 신문에서 본 것 같아요.

택시가 왔는데 우리가 장벽 근처로 태워 달라니까 운전수가 말했어요.

포츠다머 플라츠 근처까지는 갑니다. 브란덴부르크 방향은 아직도 막혀 있어요. 차와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필하모니 앞에서 내린다면 가겠소.

우리는 좋다고 그랬지요. 티어가르텐 근방을 지나는데 자동차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어서 가다가는 멈추고 다시 서행하고 그러더군요. 하여튼 간신히 필하모니 부근에서 내려 인파 속을 걷기 시작했어요. 무슨 봄 밤처럼 가녀리게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어요. 포츠다머 광장으로 가는데 길은 완전히 군중들로 뒤덮여 있었어요. 장벽 쪽으로 다가서자 한쪽을 헐어낸 곳으로 자동차와 동독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행렬에게 길을 열어준 서독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로 맞고 있었지요. 성미 급한 서독 젊은이들은 장벽의 곳곳에서 햄머로 벽을 부수려고 내려치기도 하고 벽 위에 올라가기도 했어요. 장벽 밖으로 나와 서로 포옹하는 젊은 남녀도 보였고 어린이들과 가족을 태운 남자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장벽의 허물어진 사이로 서행을 해서 나오는 것도 보였구요. 유니폼에 가죽 장화를 신고 권총을 찬 경비병들과 코트를 입은 장교들은 묵묵히 그런 광경을 보기만 하고 서있었어요. 사방에서 합창 소리가 요란했어요. 어느 틈에 마리가 샴페인을 따서 몇 모금 병채로 마시고는 내게 내밀어 주더군요.나도 얼결에 병을 들고 마셨어요. 장벽을 나오는 사람과 길가에 섰던 사람들의 포옹이며 인사말들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울컥 하고 격한 느낌이 올라와서 그만 울기 시작했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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