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러 사회주의 혁명]페테르부르크의 오늘

  • 입력 1999년 11월 14일 18시 49분


황금빛 겨울궁전은 백야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밤 10시인데도 궁전 앞 광장은 아직 늦은 오후처럼 환하다. 관광객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광장 한편의 노점엔 코카콜라 마크가 선명하다. 10루블(약 500원)짜리 값싼 햄버거를 파는 아가씨의 손길이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혁명의무대에는 자본주의가 ‘일상’으로 들어와 있었다. ‘혁명의 도시’에 이제 혁명은 없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은 박물관에나 가야 찾을 수 있는 ‘유물’이 됐다.

도심에 위치한 최대서점 도미크마크(책의 집). 서가에는 수만 종의 책들이 꽂혀 있지만 러시아 혁명에 관한 건 좀처럼 찾기 힘들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건 시드니 셸던이나 마이클 크라이튼의 대중소설들.

여직원에게 “레닌의 책은 없냐”고 묻자 “그런 책은 박물관에나 가보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레닌이 혁명을 지휘했던 스몰니 여학교 기숙사. 지금은 시 부속청사로 쓰이는 건물 입구 대문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곳에서 만난 올가 할머니(66)는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지금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다는 올가는 “교사 시절 학생들을 이끌고 자주 견학온 성지였는데…”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나 그 옆의 손녀 나자(15)는 할머니의 얘기가 영 따분한 표정이다. “10월 혁명을 아느냐”고 묻자 나자는 “나는 그런 데는 관심없다”고 잘라 말한다.

할머니와 손녀가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보여준다면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는 ‘가난한 러시아’와 ‘부유한 러시아’의 불안한 공존을 볼 수 있다.

고물차가 덜커덕거리며 지나가는 사이사이로 젊은이들이 고급 벤츠를 몰고 다닌다. 이들 부유한 젊은이들에게 자본주의는 새로운 기회를 의미한다. 하지만 연금이 끊겨 배를 곯고 있는 노인들에게 자본주의는 ‘악몽’일 뿐이다.

〈페테르부르크〓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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