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뒤늦게 드러나는 「진실」

  • 입력 1999년 9월 30일 19시 43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200명에 이르는 양민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학살한 사실이 뒤늦게 미국측의 자료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AP통신이 보도한 당시 미군 상급부대가 ‘예하부대에 보내는 명령서’에 따르면 ‘피란민들에 대해 적으로 취급하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50년7월 미군이 주민들을 “피란시켜 주겠다”며 모이게 해놓고 무차별 사격했다고 주장, 60년대부터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그동안 주민들의 끊임없는 진정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효가 지나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가려져 온 진상의 일부가 마침내 밝혀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스레 역사앞에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현지 주민들은 60년10월 정부 소청심사위에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4년에는 미국에도 같은 요구를 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 97년에는 청주지검에 국가배상을 청구했지만 증거와 시효를 이유로 기각되었다.

은폐와 묵살의 세월이 반세기에 이르렀지만 주민들의 줄기찬 노력끝에 전쟁범죄의 일단을 보여주는 미국측 자료가 드러남으로써 우리는 역사앞에 진실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군인들이 전쟁상황에서 작전 편의와 능률을 이유로 무고한 양민을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전란중의 양민학살은 국제법과 전쟁관련 법규가 정한 중대한 범죄다. 미군이 베트남전이 한창 확전으로 치닫던 68년 당시 베트콩 섬멸을 구실로 밀라이촌 양민을 학살한 일로 미국내 여론과 국제사회의 격렬한 비난을 사고 그 학살을 지휘한 윌리엄 켈리 중위는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밀라이촌 학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노근리 학살’의 실마리가 드러난 이상 미국정부는 신속하고 능동적으로 전모를 밝히고 사실로 드러나면 사과와 배상 등 적절한 절차를 밟는 것이 도리다.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한국과의 특별한 우방관계를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더불어 우리 정부도 차제에 노근리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주민들의 해원(解寃)을 돕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해묵은 과거의 범죄나 문제들을 들추고 밝히는 것은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는, 말하자면 재발방지를 겨냥한 노력이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진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입증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면 결과에 따라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자세가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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