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31)

  • 입력 1999년 9월 28일 17시 53분


이거 분량으로 보아 이틀 밤은 새워야 하겠는데…오늘 날 샐 때까지 절반 하고나서 조금 눈 붙이고 오후부터 계속하지.

송영태가 원고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김 선배는 벌써 피로해졌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며 눈을 부볐다.

난 슬슬 가봐야겠군. 인제 내 할 일은 없잖아.

그러세요. 모두들 고마워할 겁니다.

고맙긴, 묵은 자료를 털어내게 되어서 홀가분해. 수고들 허슈.

그가 나간 뒤에도 송영태와 나는 날이 훤하게 샐 때까지 일을 계속했다. 내가 어느 대목이든 완결된 곳을 넘겨주면 송영태는 수십장씩 복사를 해나갔다.

모두 합해서 이십 페이지가 넘으면 안돼. 학생들이 순식간에 읽어치우고 열 받아야 하거든. 공단에도 보급을 할 작정이야. 우리가 한 백여 부 제작해 내면 뒤이어서 재생산들을 해낼테니까.

송영태가 복사한 것들을 추리고 매수를 헤아려 보고 말했다.

오늘 고만하지. 꼭 절반이야.

벌써 그렇게 됐어? 어머, 날이 샜잖아….

내가 데려다줄게. 가다가 시장통에 가서 국밥 한그릇씩 비우고.

애걔, 밤새 노동 착취하구 겨우 국밥이야?

이거 왜 이래. 지금 미경이는 사발면이나 먹을텐데.

참, 고것 요즈음 통 안보이더라. 발길 끊는 건 나두 좋은데 가면 간다, 오면 온다, 무슨 기별이라두 있어야 할 것 아냐. 괘씸한 것들 같으니.

걔 지금 정신없을 거야.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자 나가자.

우리는 불을 끄고 문 단속도 실하게 해놓고나서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복도는 어두웠고 엘리베이터 앞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방에 둘이 있을 적에는 스스럼이 없던 영태가 좁은 승강기 안에 단둘이 서있게 되니까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여 제 발 밑으로만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공기가 좀 부자연스러워서 그에게 일부러 농을 걸었다.

뭐야, 기도하니?

송영태는 두꺼운 안경알 속에서 나를 슬쩍 건너다보면서 멋쩍게 씨익 웃었다.

으응? 아니…그냥.

택시를 타고 내 화실 부근의 네거리에서 내려 두 사람이 다 잘 아는 시장통의 해장국 집으로 갔다. 트럭 운전사나 시장 사람들이나 아니면 밤새 술을 푼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 그맘때에 늘 북적거렸는데 그래도 여섯 시가 다 되어서인지 손님들이 한 차례 빠져나간 듯 싶었다. 우리는 주방이 가까운 맨 안쪽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 집 차림표라야 돼지 머릿고기와 순대가 가득 든 순대국밥과 뼈다귀와 우거지를 넣은 해장국이 전부다. 영태가 수저를 내 앞에 놓아 주며 물었다.

난 순대국이고 한 형은 뭐 할래?

나는 가끔씩 털 붙은 비계덩이가 숟가락에 올라오는 게 딱 질색이어서 한마디 했다.

다른 거.

영태가 아줌마에게 느릿느릿 주문을 했다.

에에 그러니까…순대국 하나 하구요, 해장국 하나에, 소주 한 병 주시구요. 순대국에는 다대기 좀 많이 넣어 주세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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