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27)

  • 입력 1999년 9월 21일 18시 45분


내가 무엇을 보았을까. 내 앞의 시멘트 벽 위에는 종교단체에서 나눠준 열 두 달 짜리 달력이 붙어 있다. 양 떼를 거느린 예수가 머리에는 동그란 광채를 달고서 길다란 지팡이를 짚고 언덕 위에 서있는 그림 아래편에 이렇게 씌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 하시도다.

내가 울컥했던 건 글이나 그림이 아니라 달력에 무수히 그어진 가위 표 때문이었을 게다. 지난 일년 동안의 열 두달 날짜마다 빈틈없이 엑스 표가 그어져 있었고 또 이번 연말에 미리 받은 비슷한 새 달력은 아직 표시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무 표시도 하지않은 저 공백의 날짜들과 이미 표를 하고 지나가 버린 작년의 날들이 여기서는 전혀 의미도 없는 시간인 것만 같았다. 내가 지켜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국 속의 작은 건더기나 정량이 지켜지지 않은 고깃점 하나,

그리고 운동 시간을 늘리는 일, 서신 검열을 완화 하거나 금지된 책을 공식적 절차 없이 반출입 하는 일, 폭행한 교도관을 징계하라고 간부들에게 항의 하는 일, 기념일마다 항의의 행사를 벌이는 일, 따위의 최소한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행위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짓들마저 계절이 지나면 사람이 바뀌면서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잊혀진다. 아니 사라졌다고나 할까.

19

나는 그 해 초겨울부터 이듬해인 팔십오 년 오월 무렵까지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하게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겪었다.

송영태는 먼저 계획했던대로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십일 월 중순에 집권당 당사로의 돌입을 감행했다. 종로쪽과 인사동 입구를 지원조가 봉쇄하여 시간을 버는 동안에 공격조는 복잡한 골목 틈틈이 박혀 있다가 튀어나와 당사 안으로 뛰어 들어가 점거해 버렸다. 그들은 모두 쇠 파이프며 각목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고 간단하게 옥상까지 점령했다. 송영태는 인근의 이층 전통찻집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검거 되지도 않았고 이후에 수배자 명단에서도 빠졌다. 그래도 겨울 동안 그는 내 화실에 가끔 나타났다. 팜플렛의 복사와 인쇄도 꾸준하게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 일에 차츰 흥미가 생겨나서 그가 없을 때에는 밤 늦게까지 나 혼자서 타자도 치고 복사도 하고 제본까지도 해냈다.

어쨌든 늦은 학업이었지만 성실하게 마치고 싶었고 이제 두 학기나 늦어도 세 학기만 더하면 일단은 첫 번째의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었다. 그래, 내 생각은 은결이와 함께 독립된 인생을 사는 것이었지. 새 학기가 시작 되었고 그전처럼 가끔씩 지도교수를 만나러 가거나 돌아오면 실기생들을 가르치며 봄도 잊고 지냈다. 삼 월 중순 쯤이던가, 송영태가 늦은 밤에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빈 화실 안쪽 식탁 앞에서 찻잔을 놓고 멍하니 늘어져 있었다.

너 학교에서도 안보이더라.

응 그렇게 됐어.

하면서 송영태는 화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저것들을 옮겨야 할텐데….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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