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51)

  • 입력 1999년 6월 24일 18시 33분


가끔씩 전화라도 할 수 없니?

그렇게 할게요.

어머니가 문갑을 열더니 뭔가 한참이나 뒤적이고나서 조그만 비닐 봉지를 꺼냈다. 그네는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지니구 있어라.

이게 뭔데요?

어머니가 봉지 안에서 성냥갑만하게 붉은 비단으로 감싼 사각형의 카드와 같은 물건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내 원래 이런 걸 믿지는 않는단다. 하지만 무서운 세월이니까….

나는 말없이 붉은 비단의 윗부분을 손톱으로 벌려 보았다. 붉은색 물감으로 그린 듯한 글자와 관음보살의 입상이 금박으로 그려져 있다.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의 무릎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짐짓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이게 뭐냐구요?

응. 그건… 부적이다. 동네 여자들 따라서 점집에 갔다가 써주길래 받아 왔다. 너희들은 미신이라구 하겠지만. 나두 전에는 그랬어.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 사람의 일이란 제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더라.

예, 어머니. 잘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모시는 시늉을 하면서 지갑을 꺼내어 동전 넣는 곳을 열었다. 그 틈에서 윤희의 굳어진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얼른 들킨 사람처럼 어머니가 주신 부적을 포개어 집어넣고 지갑을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위로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줄지어 흘러내렸다.

너 제발 몸 조심해라. 난 아마 널 다신 못 보고 죽을지두 몰라.

그런 말씀 마세요. 이제 한 서너 달 있으면 다 해결될 테니 그럼 제가 돌아와서 모실게요.

아냐. 나두 다 안다. 네 아우와 누나가 서로 짜고 거짓말만 하고 있지만 네가 나라에 큰 죄를 저질렀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걸 명심해라. 너만 옳다구 생각하구 행동하면 나라두 나중에 저희 잘못을 알구 바뀌게 될 게다. 세월이 걸리겠지만서두….

나도 참다못해 격한 감정이 되어 돌아서는데 어머니가 내 주머니에 뭔가를 찔러 주었다. 꺼내 보니 돈이었다.

이런 거… 괜찮아요.

아니다. 이제부터 날씨가 추워질 텐데 갈아 입을 옷두 사구, 가끔씩 몸보신할 고기두 사먹구 해라. 이젠 가 봐.

어머니가 내 등을 밀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너 가는 것 좀 보면 안되니?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의 등을 안방 쪽으로 밀어넣었다.

그냥 슬그머니 가겠어요, 어머니. 동네에서 누가 보면 안 좋아요.

그렇겠구나….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안방 문을 빼꼼히 열고 어두운 마루 쪽을 내다보며 나에게 어서 가라고 손을 앞으로 내저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얼른 신을 꿰고는 일부러 현관문을 요란한 소리로 쾅 닫으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등뒤에서 나를 기다리며 서성이던 아우가 얼른 따라나섰다.

형, 갈라구요?

응. 그래야겠다.

어디루?

그건 왜 묻니?

아우가 주머니에 지르고 있던 손을 빼어 내 뒷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얼핏 보니 하얀색 봉투인 듯한 게 어머니처럼 돈을 넣어 주는 것 같았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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