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10)

  • 입력 1999년 5월 8일 19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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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바지에다 위에는 공장에서도 입던 군용 야전 파카를 입고 있는 게 박이 틀림없었다. 어이 되게 춥네, 어쩌구 투덜대는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혹시나 그의 뒤에 꼬리가 붙지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서 오 분쯤 더 기다렸다. 그는 분명히 혼자였다. 나는 담 모퉁이를 벗어나 빈터의 가운데로 걸어갔다.

오형?

음, 나야.

나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막바로 질러서 말했다.

왜 그랬어? 같이 사는 사람을 꼬나박으면 되겠어?

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나는 계속해서 그를 추궁했다.

사실은 박형을 속여서 미안해. 박 형이 이해할지 모르지만 나는 민주화 운동 하구 다니다가 지금은 숨어 다니구 있어. 말하자면 수배자야. 나를 간첩이라구 생각하구 신고한 거야?

박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나두 간첩이라구 생각하진 않았어.

하고 나서 박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힘이 빠졌다.

그냥 저 아래 선술집에서 낯익은 동네 사람들하구 합석해서 술 한 잔 먹다가 자네 얘기가 나왔어. 취한 김에 뭐라고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게 언제야?

그저께 저녁에 퇴근해서 오다가.

뭐라고 말했는지 잘 생각해 봐.

뭐…그냥, 드러운 세상이라구 그랬지. 바른 말 하면 다 잡아가지 않느냐, 내 친구두 비록 여기서 목공 시다루 일하구 있지만 배운 사람이 틀림없다구.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만해, 박형. 하긴… 내 잘못이야.

아까 자네 외출하구 나서 아홉 시쯤에 형사들이 네 명이나 왔어. 방을 온통 뒤지고 자네 물건을 몽땅 가지구 가버렸어. 나는 그 사람들하구 파출소까지 가서 조사를 받구 왔어.

뭐야, 오사장 얘기를 한 거야?

아니 나두 통박이 뻔한데 쓸데없이 코 발르진 않아.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는데 공단 나간다며 방 소개를 해달라구 그러더라, 그래서 생활비 절약할려구 하루에 이 백원씩만 내라구 했다, 어떤 사람인지는 나두 잘 모르겠다, 그랬지.

그런데 순순히 놔 줘?

벌집엔 그런 식으루 동숙하는 공원들이 꽤 많거든. 나더러 협조해 달라구 그랬어. 오늘 밤에나 내일이라두 자네가 집에 돌아오면 방범들에게 연락해 달래.

나는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허공을 향해서 얼굴을 치켜들었지만 물기가 저절로 흘러서 턱 아래까지 떨어졌다. 소매를 들어 얼굴을 쓰윽 훔치고 턱 밑을 닦았다. 까마득하게 드높고 굳센 철벽이 가는 곳마다 가로막는 듯한 막막함 때문에 그랬고, 그의 술 버릇을 탓할 수 없어서… 우리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는 울었다.

박형, 부탁이 있어. 나는 다시는 여기 나타나지 않을 거야. 임사장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줘. 그러구 자네두 처음에 말했던대로만 해. 순옥이한텐 주의를 줬지만 명순씨한테두 입 조심하라구 그러구.

약속하지. 정말 미안해. 술 처먹다 실수했어. 못사는 동넨 원래가 고자질하는 야당이 많아.

자아, 일어서자. 나 통금해제까진 순옥이네 방에서 기다릴 거야. 박형이 같이 있어주면 내가 마음을 놓겠는데….

같이 가. 뭐 이별주라두 한 잔 해야되지 않겠어?

아니… 술은 더 이상 안 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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