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이회창총재, 원칙주의자인가?

  • 입력 1999년 4월 30일 19시 45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께 묻겠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직설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총재께서는 원칙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상황론자입니까. 최근 최대 정치현안인 내각제개헌 문제에 대한 이총재의 태도를 두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한마디로 이총재나 한나라당의 태도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왜 딱 부러지게 얘기하지 못합니까. 지난달 26일 의원총회에서 이총재께서는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 임기 후반에 내각제 개헌을 해서 공동정권이 장기집권하려는 음모를 분쇄할 것이며 대통령제 헌법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임기말 개헌 반대는 분명히 밝혔습니다만 공동정권이 ‘연내에’ 개헌을 추진할 경우 한나라당은 어떻게 하겠다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연내개헌 입장 궁금 ★

다시 묻겠습니다. 연내개헌은 반대하는 겁니까. 아니면 찬성하는 겁니까. ‘국민의 뜻에 따라…’ 운운의 원론적인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개헌을 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따라서 국민의 뜻은 나중에 물어보면 되는 것이고 ‘지금’ 이총재의 입장이 뭐냐는 물음입니다.

이총재께서는 의총에서 연내개헌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김종필(金鍾泌·JP)총리에게 묻기만 했습니다. “만일 김대통령이 연내에 내각제개헌을 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김총리는 공동여권에서 결별해 야당이 되어서라도 내각제 관철을 위해 투쟁할 의지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왜 자기 입장은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묻기만 합니까. 이 물음을 유심히 살펴본 독자들은 ‘이총재가 연내개헌에는 찬성할 뜻이 있는 게 아니냐’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연내개헌도 분명히 반대한다면, 자민련과 개헌문제를 놓고 제휴할 의향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김총리에게 ‘…의지가 있느냐’고 다그쳐 물을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총재의 발언 직후 측근 중의 측근인 신경식(辛卿植)사무총장은 “임기말 개헌은 분쇄할 것이지만 DJP약속대로 연내 개헌이 추진될 경우 우리 당은 대통령제만 고집하지 않고 국민이 원하는 체제를 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총재의 한나라당이 연내개헌에는 찬성하는구나’라는 해석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2002년 김대통령 임기말 내각제 개헌은 반대하고 1999년 개헌은 찬성할 수도 있다는 이유는 뭡니까.

지금의 정치상황과 3년 후의 상황이 다를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까. 물론 한나라당의 당헌에는 여전히 ‘대통령제’라고 못박혀 있지만 진짜 속뜻은 무엇입니까. 이총재 나름대로의 차원 높은 전술 전략을 갖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만 시간적으로 봐서 이제는 속뜻을 분명히 밝히고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때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 정국불안 야당도 책임 ★

이총재께서는 의총 발언을 통해 김대통령과 김총리가 개헌 약속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어물어물 시간을 끌기 때문에 정국불안과 국정혼란을 초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백번 옳은 얘기입니다.

그러나 개헌저지선이 훨씬 넘는 1백34개 의석을 가진 제1야당의 태도가 애매모호하면 여당의 그것 못지않게 정국불안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청와대측에서는 한달여 전 총재회담에서 두 총재가 나눈 얘기까지 까발리면서 “이총재가 ‘꼼수’로 여당을 교란하려한다”고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 투표결과 승복 약속을 헌신짝 내버리듯 깨버린 분은 ‘야당태도는 기회주의적’이라며 정직하게 나가야 한다고 충고하지 않습니까.

신의를 저버리고 뒤통수를 치는 청와대관계자의 말이야 3김정치의 구태라고 치부해버린다지만 어떻게 만인 앞에서 되풀이한 약속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깨버린 후배로부터 ‘정직하게…’ 운운하는 충고까지 들어야 합니까.

원칙을 존중하는 법치주의자, 3김정치를 청산하고 지역주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깨끗한 지도자,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새시대의 정치인’이라는 믿음 때문에, 1천만명에 가까운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이총재인데 말입니다.

두 분(DJP)의 내각제개헌 미봉 때문에 흐려진 정국을 더욱 흐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총재께서 먼저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DJP를 엄하게 추궁하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큰 정치’를 앞장서서 실천하기 바랍니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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