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72)

  • 입력 1999년 3월 24일 19시 03분


내가 공중수도에 가서 물을 길어 올테니까, 당신은 우선 밥부터 안쳐.

나는 차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냄비에 봉지 쌀을 덜어 넣고 물을 부어 쌀을 씻고 물 버릴 곳을 몰라 두리번거렸더니 그의 아버지가 누워서 그러는 거예요.

아가야, 물은 그냥 창 넘어 지붕으로 버리면 되느니라.

그렇게 간신히 쌀을 씻어 석유곤로 위에 얹었는데 그을음은 또 어찌나 심하던지. 그래두 다행히 형광등은 켜지더군요. 그가 물을 길어오고 손바닥만한 도마와 녹이 잔뜩 슨 식칼을 들고 고기를 썬다 파를 썰고 마늘을 다진다 두부를 썬다 하더니 찌개감을 준비했지요. 비닐 봉지에 넣어 온 김치도 썰고 우선 소주 병을 따서 알루미늄 그릇에 한 잔을 따랐어요. 그는 아버지의 머리맡에 병마개를 딴 소주를 놓고 술 한 잔을 올리더군요.

아버지 한 잔 드세요.

나는 깜짝 놀랐어요. 조금 전까지도 빈 자루처럼 구겨져 있던 사람이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더니 술 잔을 가로채다가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 넣었으니까요. 카아, 하고나서 그의 아버지는 술병을 잡더니 병째로 나발을 불었어요. 거의 반 병 정도를 넘기고나서야 그는 입가를 씻으며 병을 내려 놓았습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지요. 내 아버지는 그 정도는 아니었고 보다 깔끔했지만 삶이 황폐한 몰골은 거의 비슷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지금 조금씩 죽어가고 있잖아요. 선배는 자기 아버지의 그러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어요. 밥에 뜸이 들자 그는 곤로 위에 다시 찌개를 올려 놓았어요. 그의 아버지는 어느 틈에 사홉들이 한 병을 다 마셔 버리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어요.

얘, 거기 찬장에서 소금 종지를 좀 꺼내다구.

그는 말없이 소금 종지를 꺼내어 아버지에게 내밀더군요. 그의 아버지는 소금을 엄지 검지로 살짝 집어다 벌린 입 속으로 흩뿌리듯이 연신 털어 넣었어요. 선배는 말없이 밥상을 차리고, 그의 배 다른 동생은 공연히 신이 나서 빈 수저를 입에 물고 방안을 돌아치고,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치듯 그에 대한 연민이 솟아 올랐어요. 우리는 한 식구처럼 동그란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저녁 밥을 함께 먹었지요. 그는 아버지에게 다시 소주를 따서 한 잔씩 천천히 따라 드렸어요. 밥상을 물리고 나는 설거지를 했고 그는 아버지의 술 시중을 들었어요. 나중에 빈 자루 같던 그 반백의 남자는 흥얼거리며 노래도 부르더니 한 순간에 스르르 모로 넘어지더군요. 선배는 잠든 아이를 그 옆에 조심스럽게 누이고 토닥토닥 이불을 여며준 다음에 나가자는 눈짓을 하고는 형광등 불을 껐어요. 우리는 조심 조심 계단을 내려왔죠. 우리는 다시 염천교 부근으로 걸어 내려왔는데 밤이 깊어서 시장에는 불도 꺼지고 좌판도 비었으며 오히려 한산하던 철로변과 그 너머 판자촌이 시끌법석했어요. 거기 아마 사창가가 있었을 거예요. 내가 듣기론 그의 아버지는 아마 전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한 지주였을 걸요. 땅을 팔아 양조장도 벌이고, 작은 공장도 하다가 차례로 들어먹고, 젊은 여자 만나서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고. 우리는 남대문까지 아무 말도 없이 걸었어요.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서 내가 그에게 먼저 말했죠.

어디루 갈 거예요?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