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5)

  • 입력 1999년 2월 8일 18시 35분


밑이 검게 그을은 주전자도 꺼내어 싱크대까지 끌어온 수도의 물을 가득 담아 난로 위에 얹었고 개수대에 물을 받아 걸레를 빨았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청소하던 식으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허리를 구부리고 업드린 채 죽죽 밀어 나갔다. 걸레는 몇번 왕복하지 않아 시커멓게 더러워졌다. 캔버스들과 화판과 붓과 말라붙은 물감들과 온갖 잡동사니들을 구석으로 밀어내고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스케치북들을 치우다가 나는 일손을 멈추었다. 문득 그녀가 연필이나 콘테로 그어놓은 손의 흔적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에스키스가 계속 되거나 글을 쓰며 화상을 구상한듯한 흔적들이 보였다. 한 인물 비슷한 물체가 이리 저리로 몸을 굴리거나 구부리거나 위치와 방향을 바꾼 형상을 거미줄 같은 선으로 겹치게 묘사한 그림들이 계속 되었다. 이상한 만화처럼 눈과 작대기 같은 다리만 달린 기호 같은 형상이 이야기꺼리를 암호처럼 가득 담은 여러 도구와 장치들 사이에 있는 비슷한 장면들이 계속되고. 여러 가지 낙서가 가득찬 벽이 끊임없이 이어져 다음 장에도 또 다음 장에도 벽은 길게 이어지고. 그리고 낙서가 만화의 대사처럼 아래 휘갈겨 있기도 하고.

커다란 철장 속에 있는 작은 철망에서 죄수는 면회자와 번쩍이는 이중의 철망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때 일주일 단식을 하고 나니 간수장이 면회실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어두워서 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양 손을 짚고 철창에 매달렸습니다. 마치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처럼 말입니다. 면회실의 어두운 구석에서 오빠는 얼굴을 바짝 들이 밀고 나를 찾았습니다. 로자, 어디 있어? 하고 그는 나를 계속 불렀습니다. 눈물이 안경과 뒤범벅이 된 채로 자꾸 눈을 훔치며 나를 불렀습니다.

아, 그가 오히려 나를 면회해 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가 정성스럽게 유리 조각을 붙여 둔 먼지로 흐려진 창경을 닦고 나무 사이로 내다뵈는 오솔길 아래 과수원 길을 들여다 본다.

어느 한 순간도 무장을 풀지않고 명예로운 상처가 아물 날이 없이 보다 확고한 신념으로 살았더라면! 한 번밖에 추방당하지 못하고 인간적 두려움에 세월을 낭비하고 살아온 날들이 후회스럽구나 단 한 번이라도 보다 용감하게 살았더라면!

로자는 이 시가 자신의 비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편지에 쓴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그녀는 자신을 비웃듯이 고쳐서 썼다.

마틸드, 너는 나를 심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 그러면 아마 웃음이 나올 거야. 나의 무덤 위에는 거짓말이 새겨져서는 안돼. 나의 무덤에는 ‘지지배배’라고 두 마디만 쓰면 될거야. 이건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야. 나는 그 새가 지금 이리로 날아오고 있기 때문에 그 소리에 익숙해 있어. 그 소리는 항상 또렷하고 예쁘고 비늘처럼 빛을 낸단다. 한번 생각해 보렴. 언젠가 ‘지지배배’하고 조그맣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올 거야. 그게 무슨 소린지 아니? 그건 살랑살랑 첫 봄이 오는 소리야. 눈과 서리가 내리고 고독할 때에도 우리들 작은 새와 나는 봄이 올 것을 믿지. 만약 내가 기다리다 못해 봄이 오는 걸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나의 무덤에는 ‘지지배배’라고만 쓸 것을 넌 잊어서는 안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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