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0)

  • 입력 1999년 1월 22일 19시 16분


비행기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 앉았다. 옛날처럼 창문 가리개를 내리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비행장 주변의 낯익은 밭고랑과 개천을 내려다 보았다. 멀리 시가지 쪽에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희뿌염하게 끼어 있었고 시내로 나가는 국도 양쪽에 줄지어 선 앙상한 나무들이 보였다.

공항을 빠져 나오자 대합실에서 서성대며 기다리던 그가 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어, 형님 여깁니다!

건이 이게 얼마만이냐.

나는 그를 덥석 안아 보았다. 그러고는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흰 머리가 관자놀이 주변에서부터 정수리 근처까지 희끗희끗 번져 있었고 눈가에 주름살이 많이 보였다. 나는 건이를 구치소에서 잠깐 보고는 헤어졌고 그는 형기를 마치고 먼저 나갔다. 나보다 대 여섯 살 아래였던가 싶다. 나는 광주에서 빠져 나갔었지만 그는 시민군으로 무기를 들었고 나중에는 지하 활동으로 뒤늦게 검거 되었다. 만일 도청에서 죽지않고 포로가 되었더라면 건이도 진작에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도피하고 있던 산 동네 집에 건이가 찾아온 것은 도청에서 마지막 진압이 있었던 이틀 뒤였다. 볼이 움푹 패일 정도로 초췌하고 땟국이 묻은 샤쓰 바람이었던 그는 우리를 붙잡고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상운이 형이 돌아가셨어라우. 영준이는 나더러 먼저 피하라고 하더니 내중에 보니께 한 방 맞고 가불고. 아, 그 새벽에 우리가 서로 껴안았던 포옹을 앞으로는 다시 할 수 없으리라. 일주일이 지나자 하나 둘씩 그 도시를 빠져나온 동료들이 모였다가는 제각기의 구멍을 찾아 흩어졌다. 어떤 집에서는 노골적으로 박대하고 어느 집에서는 돈을 쥐어주며 제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호소하고 또 어떤 이는 식구 하나를 늘리면서 숨겨 주기도 했지.

차가 고물이요. 이 놈두 누가 타던 것을 얻었어요.

건이는 그래도 대견한지 안전띠를 어깨에 두르며 말했다.

형님 숙소로 가셔야지라?

아니 남수한테 가자.

예 그러셔야죠.

시내로 나가는 국도를 타지않고 중간에서 운전대를 꺾으며 건이가 중얼거렸다.

에이 돌아가야지. 길이 너무 막혀서요.

여기두 많이 변했지?

옛날 서울보다 더 복잡해졌소. 촌놈들이 너도 나도 어찌나 차를 많이 샀든가 바글바글하요.

너 인제 길눈은 좀 밝아졌니?

우리는 함께 웃는다. 그 무렵에 건이는 서울 올라와서 지리를 몰라 애를 많이 먹었다. 어느 제과점에서 집합하기로 했는데 혼자서 엉뚱하게 길 건너편의 다른 제과점에서 세 시간이나 초조하게 기다렸다. 우리는 그가 잡힌줄 알고 비상을 걸었다. 종로에서는 동행했던 나를 인파 때문에 잃어버려서 서로 엇갈리면서 열번 이상이나 오르내리며 행인들 얼굴을 살펴야 했다. 명동 지하도에서도 조원인 혜순이가 유인물을 뿌리고는 그를 잃어버렸다. 그래도 일차 집결지인 극장 앞에는 잘 찾아왔다. 어떻게 찾았느냐니까 그 영화를 꼭 보고 싶어서 거기는 머릿속에 콱 찍어 놓았단다. 정말 그는 이제 길을 잘도 찾아내는지 차가 막히지도 않고 도심지를 에돌아 망월동으로 나가는 한적한 교외로 다시 나섰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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