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남산골보리밥칼국수’의 바지락 칼국수. 1인분에 9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남산골보리밥칼국수’의 바지락 칼국수. 1인분에 9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김도언 소설가해방촌은 서울 남산 자락의 비탈을 따라 서민들의 삶이 층층이 축적된 동네다. 그러나 요즘 해방촌은 오랜 세월을 지켜온 맥박과는 달리 빠르게 소비되는 풍경이 돼버린 느낌이다. 간판들은 세련됐고, 골목은 인스타그램용 사진의 배경이 된다. 그런 와중에도 골목 초입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집이 있다. 이름도 별 치장이 없는 소박한 ‘남산골보리밥칼국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먼저 정방형의 홀이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술처럼 펼쳐지는 깔끔하고 정갈한 상차림이 눈에 들어온다. 차례차례 놓이는 대여섯 가지 반찬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채 제철의 맛과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때 사장님이 반찬가게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밑반찬 하나하나가 명품처럼 느껴진다. 찬을 사다 쓰는 식당들과 견주는 것이 무색할 만큼 반찬의 기본기가 단단하다.
해방촌 거주 20년 주민인 시인 황인숙 선생의 단골집이라는 사실도 이 집을 설명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황 시인과 함께였는데, 선생의 도타운 지인치고 이 집에 안 와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시인의 절친으로 알려진 소설가 고종석 선생 역시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집에는 자연스레 문학적인 기운이 서려 있다. 식탁 위에서 오가는 말들은 높지 않고, 웃음은 크지 않으며, 대신 오랜 여운을 남긴다.
남산골보리밥칼국수의 대표 음식은 바지락칼국수와 김치칼제비, 보리밥비빔밥, 청국장 백반 등이다. 모두 일반 가정의 한 끼 상차림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바지락칼국수는 바다 내음을 품으면서도 육수의 뒷맛이 과하지 않고, 김치칼제비는 잘 익은 김치의 깊은 맛으로 속을 다독인다. 갖은 나물들과 함께 비빈 보리밥비빔밥을 한 술 뜨면 소박한 충만이 찾아오고, 청국장 백반은 그 구수한 향으로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비우게 한다. 수육, 묵은지돼지갈비, 묵은지닭볶음탕, 도토리묵, 계란말이, 황태구이 같은 메뉴는 술안주로도 훌륭하다. 과장된 플레이팅 대신 그저 식객의 허기와 고독을 배려하는 차림이다. 이곳에서의 한 잔은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노동을 멈추고 하루를 정리하는 안식에 가깝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집을 닮은 손님들이다. 관광지처럼 변해가는 해방촌에서 이곳만은 묘하게도 소란이 없다. 선량한 인상의 사람들이 조용히 들어와 조용히 식사하고, 큰 소리 없이 돌아간다. 식당이 사람을 닮는 것인지, 사람이 식당을 닮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엔 비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 이를테면 ‘문학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공기 말이다.
남산골보리밥칼국수는 유행을 좇지 않는다. 대신 시간과 세월을 적립한다. 정직하게 가게를 운영한다는 말이 이곳처럼 어울리는 곳도 드물다. 해방촌이 빠르게 변해도 이 집의 밥상은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진다. 그래서 단순한 밥집이 아니라 한 무리의 착한 사람들의 쉼터이자 한 편의 따뜻한 수필 같은 공간이다. 수줍게 고백하자면, 이 집이 우리 동네에 있다면 매일이라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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