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21)

  • 입력 1998년 11월 12일 18시 40분


출분 ③

다음날 소희와 두환이 함께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두 집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뒤쫓아갈래도 전혀 방법이 없었다. 출분은 계획된 것이었고 소희의 성격에는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소희가 임신을 했다는 뒷소문은 믿기 어려웠지만 그 대목에서 승주는 벽을 치고 울었다.

사실은 떠나기 전날 밤 소희가 나를 찾아왔었다. 누가 찾는다기에 집앞 골목으로 나갔던 나는 소희의 모습을 보고 초저녁부터 이건 또 무슨 꿈인가 했다. 소희는 담에 자전거를 기대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자전거 쪽으로 한 발 물러났는데 그 순간 핸들이 담에 닿으면서 찌리링, 하고 짧게 경적이 울렸다. 소희는, 나 내일 떠나, 라고 말했다. 나는 안경 속에서 눈을 꿈벅였다. 고개를 숙인 채 발부리로 서너 번 담을 가볍게 차면서 소희가 이렇게 덧붙였다.

“난 평생 변치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어. 그걸 좀 기억해주지 않을래? 그 말을 하려고 왔어. 세상엔 비밀이 많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하잖아.”

소희의 말을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를 좋아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평소의 거만함을 되찾았다.

“그 한 사람이 왜 하필 나지?”

“왜냐면, 너는 내 친구니까.”

소희가 출발하기 전에 했던 말과 표정은 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소희는 페달을 밟으려다 말고 불현듯 나를 돌아보며, 지금까지 편지 쓴 거 너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달빛처럼 하얗게 웃었는데, 그처럼 불안하고 그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지금도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야 말이지만 그때 소희가 한 말을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애매한 말을 소희 자신이라고 알았을까? 나는 승주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두환이 자식보다 내가 못할 게 뭐 있냐는 것이다. 우연히 두 남자가 괴한에게 쫓기는 여자를 보았다고 하자. 이때 한 남자는 여자를 구출하고 다른 한 남자는 괴한의 뒤를 추격하게 마련이다. 실신한 여자를 품에 안는 배역과 죽어라고 범인을 뒤쫓아가서 얻어맞는 배역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소희는 무엇에 쫓겼던 것일까.

조국은 그 일로 오랫동안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물리선생이 무서운 가속도로 보복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못 견디고 자퇴서를 냈다. 그걸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조국의 아버지는 대통령의 공업육성 정책을 철저히 믿었는데, 아버지의 생각에 조국이 대학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동계진학밖에 없었다. 조국은 공고로 편입하기 위해 자퇴했던 것이다. 나는 공부를 좀 했다. 3학년 진급 때 열반(劣班)과는 작별을 하고 우반(憂班)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희망찬 새학기 첫날 나는 그동안 공부했던 ‘핵심영어’를 버리고 너무 깨끗해서 기분도 상쾌한 새 ‘종합영어’를 호쾌하게 책상 위에 꺼냈다. 그러나 짝이 꺼내놓는 ‘종합영어’는 책등이 새카맣고 나달나달했다. 알고보니 나만 빼고 반 전체가 모두 다 그런 낡은 ‘종합영어’를 구비하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한 우반에서는 남과 다르다는 것이 별로 자랑이 되지 않았다. 지옥 같은 1년을 보낸 뒤 나는 재수생이 되었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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