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78)

  • 입력 1998년 10월 19일 18시 38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 (21)

나는 낯선 거리를 혼자 걷고 낯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낯선 상점에서 신문과 과일과 맥주와 건전지 따위를 삽니다. 그리고 이 낯선 곳에서 공교롭게도 사설 우체국의 여직원이 되었어요. 지금 퇴근을 해 광장 가장 자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저녁은 마치 커튼을 친 커다란 실내 같군요.

일년이 넘도록 어떤 남자 여자도 없이 낯선 사람들 속에서 혼자 지내 왔어요. 일년 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는 건 거울이라고는 전혀 없는 벽의 세상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향이 없는 삶. 그러나 어쩔 수 없죠.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지금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립니다. 그는 내가 다니는 사설 우체국 근처에 있는 중학교의 수학 교사랍니다. 그는 우표를 사러 왔고, 등기를 부치러왔고, 괜히 와서 잡지책을 넘기다가 가기도 했어요. 아직 어리고 길쭉한 몸을 가지고 있고 티베트의 라사에서 샀다는 물고기 장식이 달린 긴 목걸이를 옷속에 숨기고 있습니다. 싱그럽고 예의 바르고 진지하고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아직 아무런 편견도 없는 너무나 건강한 젊은 남자. 두 달 전의 수요일 퇴근할 무렵 들른 그는 나에게 저녁을 사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속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꿈에도 모를 거예요. 마치 날카로운 보석을 삼킨 듯 몸 안이 다시 환해지던 그 통증 어린 느낌을.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생의 처음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단지 설레임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뿐. 어쩌면 아무일도 생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좋아요. 70년이 지난 뒤에야 그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사랑을 깨닫는다해도. 다만 일주일에 한번씩, 수요일마다 함께 저녁을 먹는 이 아름다운 약속이 가능한 더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램밖에는….

전에 한 남자가 나에게 말했죠. 사랑에 잘 빠지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다 덜 선량한 사람들이라고요.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고 사실은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집요하면서도 변덕스럽고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그 말이 맞아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런 부류의 사람이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평화. 가난, 고백할 수 없는 사랑, 먼 곳에 둔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격렬한 그리움, 온갖 현실적인 장애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선택하지 않아요. 내 생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 방법 밖에는 없죠. 언젠가 나는 문 없는 벽을 지나 온 것 같아요. 그 후론 나를 괴롭힐 것이 남아 있지 않답니다.

그런데도 생에 대한 나의 의욕은 불가사의해요. 나는 다른 어느 때 보다 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처음처럼 세상을 향해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낯선 거리를 걷는 여인인 나…. 당신들의 예상과 달리 나에게 슬픔은 없답니다. 아무 곳에도 뿌리 내리지 않고 진흙 한 점 묻히지 않고 피어나는 물위의 꽃처럼 말이예요.

광장에 저녁 바람이 불어와요. 얇은 여름 원피스가 바람에 활짝 펴집니다.

내 생은 우산을 펴고 보이지 않는 먼 먼 공중으로 아득히 날려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언젠가는 훼손되지 않은 그 처음으로 가닿고 싶어요. 내 꿈의 맨 처음으로….〈끝〉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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